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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 gwachaeso
  • 3월 17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9일

뮤지컬 <곤 투모로우>



■의 얼굴을 정훈은 기억하고 있다.


정훈이 ■과 얽힌 사건은 정훈이 아직 귀로에 오르기 전 벌어진 일로, ■이란 이제 어디에도 기록된 바 없으되 행간 사이에는 남아있어 항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가리켰다. ■의 기록은 의도적으로 말소되었다. 문제가 된 것이 꼭 그만의 행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당시 ■이 소속된 부대(우리는 여기서 ■이 정훈과 같이 군인―그보다는 용병 된 자임을 알 수 있다)는 어떤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기록으로 남기기엔 다소 수치스러웠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땅에서 ■의 이름을 기록한 곳은 그의 이름을 지운 그곳밖에 없었기에, 그곳에서 지워진 순간 이 땅에서의 그도 지워져 ■은 ■으로밖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정훈이 ■과 마지막으로 조우한 때는 그 전으로, 따라서 그때의 그에겐 ■이 아닌 이름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를 회상하는 이날엔 더는 남아 있지 않은 이름이니 그리하여 ■은 ■으로 서술되었다.


안녕, 훈. ■은 정훈을 ‘훈’이라고 불렀다. 이는 지금 정훈의 옆에 선 소피가 정훈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음절을 따온 것이었지만, 소피가 그러했듯 ■의 발음은 ■의 모국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조금 있었다. 모국의 억양을 가진 그를 보았을 때 정훈은 소피를 조금 뒤로 물렸다. 오랜만이야. 옆에 계신 마드모아젤은 누구셔? 피앙세? 그에게선 술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아니었더라면 소피 역시 붙임성 있게 ‘처음 뵙겠어요. 훈의 동료이신가요?’라고 말을 붙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술에는 물리지 않은 남자의 조끼가 풍기는 독한 와인 향은 이 모든 가능성도 함께 뒤로 물렸으니, 소피는 정훈이 그를 경계하는 만큼보단 덜하겠으나 단순히 낯선 이가 말을 걸었을 때보단 조금 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묵했다. 소피가 물러선 발을 다시 원위치할 각오를 내지 못하는 동안 정훈은 말했다. 실례야. ■. 그리고 많이 취했어. 대낮부터. 이런, 자네도 나를 경멸하는가? 아니, 경박하다고 말하고 있어. 그건 사실이지. 난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네. 지금도 단순히 반가운 얼굴을 보아서 말을 걸고 싶었을 뿐이라서…… 그 외의 볼 일은 없네. 그럼 이만 사라져 주는 게 답이겠지. ■은, 그 의식이 명료하고 분별을 갖추었을 때 정훈의 목숨을 예닐곱 번 구해준 적이 있었다. 사리에 밝고, 상식이 훤한 그는 어떻게 하면 적의 총구를 피하고 코 밑에 바짝 나이프를 들이댈 수 있는지도 알고 있어서, 많은 이가 그 덕에 목숨을 건지고 건진 목숨을 다시 던져버렸다. ■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직전에 불명예 제대한 뒤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그 뒤 오늘이 정훈과 ■이 재회한 날이 되었다.


■은 그 말대로 손을 휘젓고는 발을 돌렸다. 그럼 잘 지내게나. 어디서든. 정훈은 한 박자 늦게, 자네도.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어디서든 ■가 잘 지내는 미래는 정훈의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의 머릿속에는 그런 정훈이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발을 떼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린 그는, 그가 시야에서 제대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을 작정이었던 정훈과 기다렸듯 눈을 맞췄다. 그야 자네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내가 기도해 주지 않아도 자넨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근데 그럴 사람이기도 한가, 자네가?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사람에는 차이가 있고, ■는 때때로 예지에 가깝게 앞일을 내다보고는 했다. 오래전 그는 그것이 자기 고향 마을에서 그의 어머니가 가진 직업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진실은 언제나 불명이었다. 정훈이 ■과 얽힌 사건은 이게 다였다. 소피의 진술에 따르면 그러했다. ■이 도심 한복판에서 방화를 기도하였을 때 정훈은 이미 귀로에 올라, 그곳에 내려,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훈은 그때 물 한가운데에 있었다. 고작해야 벽돌 열댓 장을 그을리게 한 뒤 체포된 ■는 죄질이 심히 불량하다는 판결과 선고를 받았다. 소피가 참석한 재판장에서 ■는 꼭 불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제 억양을 들키기 싫은 사람처럼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혀를 굳혔다. ■의 혀가 풀어진 날이 언제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말소되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그림자를 보길 원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따라서 ■의 이름은 후일 소피의 회고록에만 등장하게 되었으나, 그때쯤 이르니 ■의 이름을 적어도 ■을 안다고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소피는 ■의 억양이 이국적이라는 것만 알았기 때문에 그의 모국이 어딘지는 끝내 알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했다. 진실은 언제나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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