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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春海

  • gwachaeso
  • 3월 1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9일

드라마 <괴물>

엔딩 이후 바다에서 지내는 이동식



우리는 봄의 거스러미를 붙들고 태어났는데, 일찍이 어느 봄날도 그 아이와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애의 모든 봄에 함께한 나는 한봄에 피어난 어느 꽃보다도 어여쁜 그 애를 누구보다 일찍 알아보았지만, 나 홀로 맞이한 봄이 그리도 서글플지는 알지 못했다. 겨울을 지나온 봄에는 겨우내 얼었던 시내가 녹아 졸졸 물소리를 내며 흘렀다. 나는 단지 그 소리를 더 듣고 싶어 가까이 갔을 뿐인데, 돌연 내 사지를 붙잡는 우악한 손길이 있어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랑 위를 굴렀다.


“이놈아, 거긴 왜 가려고 들어. 거거 깊은 물인 거 토박이인 네가 몰라?”


모를 리가 없었다. 모를 리 없어 나는 그곳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허옇게 질린 얼굴이 웃겨 농을 쳤다.


“빠지면 아저씨가 목숨 걸고 구해주겠지.”

“야가 큰일 날 소릴 하네. 나 수영 못 혀!”

“그니까. 목숨 걸고 구해줄 거라고.”


그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다 그려, 알았으니께 가자, 하고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때 그를 고약하게 놀리는 것에 재미가 들려 히죽대고 웃었다. 골리는 게 맞나? 그렇지만 그가 내게 잘해줄수록 나는 그가 내게 잘해주는 이유를 잊지 못하였고, 그렇기에 나는 영원히 그의 과를 잊지 못하게 되었다.


“쫄기는.”

“안 쫄았어, 인마.”


다 지난 일이다.


“에이, 쫄았으면서.”


지나기는 무슨!


나는 그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그는 나를 사랑하면서도 미안해하니, 이건 제법 수지가 맞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조립식 관계를 썩 싫어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면 좋았겠다마는. 정말 좋았겠다마는. 지금에 이르러 어머니의 의식이 노니는 저편에는 누이가 함께 있고, 아버지의 숨이 꺼진 저쪽에는 아저씨가 함께 찻잔을 기울이고 있을 터다. 그들 사이에서 아니야. 우리 유연이는 살아있어. 우리 유연이는 돌아올 거야. 그리 말하며 눈을 치뜨던 오라비였다, 나는. 죽은 거야. 돌려줄 생각이 없는 거야. 그치만 만양에 눈 나리는 날이면 어딘가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누이의 신에도 소복이 쌓인 눈으로 젖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끝내 놓아버리지 못해 고개를 휘휘 흔드는 오라비였다, 저는. 마흔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동식은 제 몸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그는 어느 날 차를 몰아 부산에 갔고, 1년을 조금 넘길 때까지 만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동식을 찾으러 온 건 한주원이었다. 한주원이 이동식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이따금 권혁에게서 사과 박스를 선물로 받았다. 그해에 새로 난 햇사과로 가득 채운 박스였고, 한주원은 언제나 계좌로 값을 입금하여 권혁에게서 정 없지만 여전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동식은 갑판에 앉아 있었다. 돗자리를 깔고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덮고 누워 있다 한주원이 오는 걸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님 기일에도 오지 않으셨다면서요.”

“대신 한주원 경위가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이동식의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셨던지라 제사상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사실 이동식도 어머니 기일에는 봉안당에 인사드릴 계획이긴 했다. 왜 계획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이동식은 쓰게 웃었다. 머리가, 아파서.


“머리가 아파서요? 병입니까? 검진은 받아 보셨습니까?”

“그건 아니고.”


오랜만에 땅을 디디니 그렇게 머리가 아플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미간을 찌푸리던 한주원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출렁이는 땅이 입을 벌려 이동식에게 속삭였다는 이야기를.


“왜 지하실에 있느냐고 물었지요? 땅 위엔 있을 곳이 없어서 그래요.”


땅이 말했다. 네 아비와 어미와 누이와 벗과 딸의 피가 네 손에서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네 손에서 떨어지는 피를 입 벌려 마신 나는 더는 네게 내 소산물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이동식은 억울하여 소리쳤다고 했다. 그자는 악인이었습니다. 악인이었습니다! (말하며, 그는 4년 전 광역수사대 시절 제 파트너가 죽은 사건에 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의 입으로 그날을 다른 이에게 말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땅이 물었다.


네 누이는 어디 있느냐?


이동식은 차마, 내가 누이를 지키는 자입니까? 묻지 못하고 입을 폐했다고 한다. 네 아비는 어디 있느냐? 이어서 가리키지 못하는 손을 폐했고, 네 어미는 어디 있느냐. 움직이지 못하는 발도 폐했다. 네 벗은 어디에 두고 여기 있느냐. 그는 땅속으로 굴러 내려갔다.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 자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땅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딸은 어디 있어?


“그러고는 나를 삼키려 들더라.”


이동식은 만양을 떠났다.


“그게 돌아오지 않은 이유입니까?”

“바다로 갔어요. 근데 땅과 달리 물속으론 들어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배 한 척 동동 띄우고 나아질 때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글쎄, 더는 걸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 다리로. 시도해봤는데 몇 발짝 떼기도 전에 다리가 풀리데. 꼴사납죠?”


이동식은 실없는, 허하기만 한 웃음을 터뜨렸다. 살아있는 이동식을 보는 것으로 볼일을 마쳤기에 한주원은 서울로 다시 올라갔고, 며칠 후 풍랑이 일어 항구에 정박한 배까지 몇 척 사라졌다는 기사를 읽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물에 빠져 죽는 건 한주원 씨에게도 예가 아니지. 걱정돼서 서울서 달려오셨구나. 미안하게 됐네.”


더 머물 이유는 없어 지체 없이 떠났다. 서울로 차를 몰아 몇 개의 나들목을 통과하는데, 한주원은 문득 그가 물에 잠겨 죽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땅 위에도, 아래에도, 물속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는 표면에서 부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한주원은 남상배와 그런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나이 사십 먹은 경찰이기까지 한 사내를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살피는 이유가 뭡니까? 그리 물었더니 남상배, 스물밖에 안 먹은 애를 물가로 내몬 게 나였으니까. 대답한 게 기억났다. 나중에야 급하게 물에서 건져놓으니 그사이에 물을 많이 마셔 한 됫박은 물을 토해내는데, 그 뒤론 갸가 물만 바라보고 있어도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라. 그러니 너도 얼른 돌아가, 이놈아. 뭐 좋을 게 있다고 노친네 물 구경하는 거 구경이나 하고 있어? 한주원은 그의 말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놈이요? 하고 저를 부른 기가 막히는 호칭을 걸고넘어지기로 하는데,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상배, 한주원의 얕은수에 넘어갈 리 없었다.


“아 거 익사하는 꼴 두고 볼 거야?”


그 말에 퍼뜩 눈을 뜨니 병원이었고,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이동식이 옆에 앉아 있었다. 푹 잠긴 목소리로 깼니, 그 한마디 하고 말이 없어 한주원은 목이 타는 아픔 속에서도, 반말하지 마십시오, 그 짧은 문장을 기어코 입 밖으로 내어야 했다. 아이고, 한 경위. 멀쩡하구먼. 그제야 안심하고 웃을 줄은 누가 알려주었을까? 한주원은 남상배를 떠올렸고, 그날 그가 이틀 꼬박 잠 못 이루고 버틴 까닭이 오늘 들은 파트너와의 일 탓임을 알게 되었고, 신호가 바뀜에 따라 운전대를 꺾었다.



사해는, 실은 호수라지만 염분 농도가 높아 사람이 누우면 동동 뜬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나 혼자 빌어선 턱도 없이 부족하겠으나, 스무 해 전 누이의 전화가 불이 나듯 오는데도 끝끝내 귀 대지 않은 내가 소금 기둥 되어 바다에 녹아들었다면 아직 당신의 숨이 붙어 있을 적에 당신을 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무심한 나는 녹아 소금 한 줌이나 되면 다행이라만, 당신이 삼킨 해수는 오늘날 내가 흘린 눈물만큼 짜디짜서 나는 민물이 고팠다. 조갈나는 목을 움켜쥐고 쥐어짜고 짜부라뜨리다 날이 지나면 발인이다. 나는 상주가 되어 있었다.


꿈의 마지막에는 이유연이 나왔다. 그가 나올 적에는 항상 스무 살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이동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유연과 저는 쌍둥이인데 저 혼자 늙어 있으면 불합리한 탓인 것 같았다. 나이 들지 못하는 꿈속의 이유연 대신 이동식은 시계를 돌려 젊어진다. 그렇게 20년 전, 30년 전,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나이 든 몸뚱어리와 함께, 주름진 손과 함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이동식의 일상이다.


“고기 잡을 생각도 없는 놈이, 바닥이 출렁출렁하니 잠은 잘 오나 봐?”


오지화가 찾아왔다. 문 잠그는 법을 잊은 제집 지하실처럼 이제는 이 배가 그리될 모양이었다. 웬일이야. 휴가야? 비번이다, 이 자식아. 그럼 집에서 쉬지 않고. 그는 이동식의 팔을 잡아끌 생각 않고 배 밖에서 그를 불렀다. 이동식이 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자의 여유였다.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때깔 보니 아직 밥 안 먹었지? 아저씨가 이 집 복국 좋아했잖아.”

“그랬지.”


땅 딛기 무섭게 메슥거리던 속이 뜨끈한 국물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오지화는 이동식이 수저를 휘적이는 꼴을 지켜보다 제 밥 한술을 크게 떴다.


나 간다. 식사를 마치고 종이컵 커피까지 한 잔 비우자 오지화는 지체 없이 차를 주차한 곳으로 걸어갔다. 너 정말 밥 한 끼 먹으러 여기까지 내려왔냐. 지는. 앞 유리를 내리고 인사하는 그는 전보다 머리가 많이 기른 채였다.


“조심히 올라가고.”

“너도 가끔은 좀 올라와. 지훈이랑 재이가 너 걱정 많이 한다.”

“안 그래도 재이는 저번에 왔다 갔어.”

“그래? 근데 아직 안 죽었네?”

“맞아 죽는 줄 알았다.”


농이 아니었다. 이동식은 멀어지는 차를 배웅한 다음 항구로 다시 돌아갔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웅크려 있자면 흔들어 깨우는 손이 있어 머리부터 가렸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알아볼 때까지 물러서다 벽에 등을 기대고는, 밥 먹자, 그러고 나를 식탁으로 데려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생경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았고, 얼른 한 술 안 뜨고 뭐혀. 그제야 허겁지겁 빈속에 맨밥을 욱여넣으니 당신, 푹푹 한숨을 내리다 내 죄가 크다, 내 죄가 커, 하고 밥상머리에서 대뜸 고해를 했다. 소금간 된 고등어는 너무 짜서 도리어 물을 마셔야 하는 나는 당신처럼 귀한 물을 밖으로 흘릴 수 없었다. 당신은 한숨 쉬고, 나는 밥을 먹었다. 당신은 후회하고, 나는 반찬을 집어 먹었다.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채워 넣는다면 금이 간 항아리에도 물이 찰랑댈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내리쳐 산산조각이 난 밑 빠진 독에는 물이 차오르기 무섭게 내리 꺼져 남은 것이 없었다. 부서진 독은 생이었고 빈 생은 독이었다. 허무라고도 읽혔다. 이동식은 허무했다. 공허였다. 공허하였다.


이제는 울렁거리기까지 하는 속. 밑바닥엔 손바닥만 겨우 적시는 바닷물이 출렁거린다. 이동식은 배로 돌아가는 발을 재촉했다.



한주원은 절망으로 광을 낸,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기억했다. 광에는 무슨 곡절이 있기에 두 뜻을 같은 소리로 발음하게 되었나. 한주원은 이동식의 눈을 볼 때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을 감상적인 생각을 했다. 빛 서린 눈에 도사린 독은 자기 자신도 예외로 두지 않고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도 당신이 댕긴 불은 꺼지지 않을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동식은 미쳤다. 돌아버렸다. 돌이킬 수 없이 미친 그가 땅 위도, 땅속도, 물속도 모두 거부하고 부유한 채 살기로 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주원은 이동식의 21년을 보상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더랬다. 일곱 해가 세 번 반복되는 동안 미친 사람 곁에 그는 감히 머물 수 없었고, 머물 까닭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1년 후 다시 만난 날 안심했던 까닭은 그가 여전히 돌아있기 때문이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치 돌아버린 미친 인간이라 그 고생을 하고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멀고도 굽이치는 길을 다시 걸어 돌아갈 짐을 꾸리는 그는 적어도 일곱 해가 다시 세 번 반복되기 전엔 돌아가겠지, 싶기 때문이다. 다시 1년 후 배에서 만난 날 절망했던 까닭은 이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에서 언젠가 당신을 의심케 한 빛 사린 열을 다시 느끼는 날이 올까? 한주원은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복기했다.


내 눈에 켜켜이 쌓인 것들은 단단히 굳어 빼내려고 해도 빠지지가 않습니다. 이 뒤에 있는 나의 눈은 이미 녹아내려 제 기능을 못 할지도 몰라요. 나는 당신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겁니다. 당신을 보기 힘겨워할 겁니다.


내가 당신을 바로 볼 수 있을까요. 바란다면 확인해볼까요. 한주원 경위.


울렁이는 속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눈을 감고 나를 보지 않은 당신. 당신이 다시 눈을 뜨길 바라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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