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정
- gwachaeso
- 3일 전
- 3분 분량
<HQ!!>
사쿠우시
고백
절망을 등정하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본시 손쓸 수 없는 무력함과 완강기 따위 없는 추락에 그것의 본질이 있지만, 떨어질 것을 이미 안다면 오름에도 충분히 깃드는 것이 절망이었다. 소설의 5단 구조가 인간의 생에도 적용된다면 나는 절정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은 다시 말해 절망과 다름없기도 했다. 시시포스가 굴린 바위가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가 겪은 발단과 전개와 위기는 관심 없었다. 관심 있는 것은 도달한 찰나, 미분하면 기울기가 0이 될 극점, 떨어지기 직전 그 순간에 오롯이 존재할 절정, 절망밖에는. 그마저 지나가면 남은 건 결말밖에 없었다. 그래도 시시포스의 바위는 다시 언덕의 능선을 따라 영원한 형벌을 반복하는 것과 달리, 이 점에서 신화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나는 유한한 생의 이점을 한 가지 누릴 수 있었다. 이 고통을 반복하여 겪지는 않으리란 것. 자동으로 결부하는 단점은 그러하므로 돌이킬 수 없으리란 것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시시포스처럼 다시 이 절망을 반복하는 형벌에선 제외될 것이다. 바위는 산산이 부서져 두 번 다시 합쳐지지 않을 테고, 나는 그들 중 가장 큰 파편을 침상 삼아 잠들 터이니 말이다. 이는 돌로 짜 맞춘 나의 관이 될 것이다. 만약 네가 뚜껑을 닫아준다면 나는 조금 행복하고 오래 슬퍼할 것이고 말이다.
이 모든 상념을 환기하게 된 이유로 나는 감히 너를 세운다. 원인은 나 외에 다른 이가 되지 못한다. 기껏 마음을 전하고자 결심했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은 나의 천성을 기어이 바꾸지 못한 나. 결국 최악밖에 가정하지 못하는 나. 마침내 네게 고백하는 순간에도 이러는 못난 나.
“그래서.”
이젠 마음을 정했나?
“응.”
정오에 너와 만났다. 자정까지 세 시간 남은 뒤에야 겨우 절망을 목도할 준비를 마친 나였다.
너는 물었다. 그래서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네가 내게 그리 말하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으니 내가 네게 그리 말했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재촉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네가 수 개월 만에 귀국하여 우리가 같은 땅에 있으매 우리 사이에 시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가늠한 시간과 시각은 너와 같으니 그 말은 곧 네가 적잖은 시간을 기다렸다는 소리가 되었다. 실은 아주 긴 시간을. 사실을 말하면 아홉 시간도 아닌 시간을. 너와의 약속은 전일 확정되었다. 그러니 너는 아홉 시간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을 기다린 셈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음.
전화로는 하지 못 할 말이라는 궁색한 변명에 만약 네가 ‘전화로도 하지 못 할 말은 대면으로도 하지 말아라.’라고 대답했다면 내게 조금 더 이르게 찾아올 수 있었던 절망이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조금, 정말 조금 필요하다고, 그 전에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느냐는 억지를 너는 왜 순순히 들어줬을까? 그럼 그러자고 네가 담백하게 대꾸한 순간부터, 너와의 전화가 끊기기도 전부터 계시기는 동작하기 시작했고 나의 절망도 시작되었다. 등정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약속 장소에 미리 나와 기다리다 너를 본 순간 나는 마침내 모래시계를 뒤집어야 했지. 오늘이 가기 전에 말할 수 있도록 수를 쓴 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지. 안부를 묻는 건 좋았지만 뒤따르는 모든 질문은 바보 같았고, 더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 생각한 순간마다 곤란한 상황이 나를 덮치고 어수룩한 결정밖에 내리지 못했지……. 그러나 너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나의 실수를 덮고, 식사를 마친 뒤에도 시간이 더 필요한 나를 위해 공원을 가리키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그동안 나는 점점 더 산소가 모자란 고산 지대에 접어들었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다. 자정이 되려면 몇 시간 남았지만 그때까지 너를 붙잡을 순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이 절망의 절정에 이를 때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보낸 시간은 행복하였으며 한시도 고통스럽지 않은 때가 없었다.
밀어 떨어뜨리자.
“좋아해.”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친절한 너는 저녁까지, 조금만 더 같이 시간을 보내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염치 없는 말이 내 입으로 나오지 않도록 배려해주었지만, 너를 붙잡고 조른 끝에 나온 것이 이토록 덧없고 못난 고백이니 시들할지도 몰랐다. 그런 건 너와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너는 바라지 않는데. 그런데 남은 건 이제 결말밖에 없어,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도 그것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떨어질 준비를 마치고, 동시에 떨어졌다. 시도하지 않았으면 떨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시시포스도 벌을 끝내기 위해 언덕을 오르고 바위를 구르는데, 알면서도 바보같이, 멍청하게 시도한 이유야 당연히 있었다.
오르지 않으면 과연 떨어지지도 않겠지. 그 대신, 가까워지지도 않을 테니까. 당연히.
나란히 앉았던 벤치에서 일어났다. 산산이 부서진 마음 위로 누워 장사 지낼 채비를 마친 내게 갑자기 뻗는 손이 있어 나를 붙잡았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너는 네 눈과 입이 말하는 것이 같아 언제나 거듭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너를 좋아해. 나는 그런 너를 좋아했다. 지금도 그런 너를 좋아한다.
고개를 숙이지 않은 건 이게 정녕 마지막이라면 너를 눈에 담고 싶다는 욕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네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