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 gwachaeso
- 3월 20일
- 7분 분량
<검은방>
강민혜진
유리창이 없는 복도식 아파트엔 겨울바람이 여과 없이 들이닥쳤다. 집주인 앞에서 손님이 집 열쇠를 당당히 꺼내는 것만큼 주객전도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상황은 흔치 않을 거라고, 혜진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강민과 강민의 집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돌리며 생각했다. 그들의 일 처리 방식을 생각하면 여분의 열쇠를 두는 것에 동의를 구했을 가능성은 적지만, 애초에 그가 직접 구한 집도 아니고 잠시 빌려 쓰는 거주자에 불과한 강민의 동의는 처음부터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역시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문을 여는 것은 안전한가? 제 뒤에 있는 남자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부비트랩 같은 걸 설치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 그러나 열쇠는 이미 다 돌아갔고 잠금은 풀렸다. 열쇠를 빼내던 혜진의 손이 잠시 머뭇거렸으나 추위에 곱은 손이 미끄러져 버벅대는 것과 모양새가 다르지 않았고, 아주 짧은 시간 후 혜진은 실로 그러한 것처럼 열쇠를 뽑아냈다. 교인이 언제 들락날락할지 모르는데 트랩을 설치하여 그들을 위협하는 건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강민이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겨자씨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으며, 어르신들도 그 정도 어린애 장난질로 인한 피해는 보고 받길 귀찮아하는 걸 아는 혜진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죽든 말든 다치든 피를 보든 상관없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온 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은 그렇다.
그를 돌아보면 그는 이곳까지 걸어오는 내내 그랬듯 무표정했으며 오히려 안 들어가고 뭐 하냐고 혜진을 눈짓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황하는 표정같이 귀한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상대에게 무안함을 안겨주는 데 손색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예의상 해야 하나 했던 변명도 쏙 들어갔다. ‘어른들이 하나 갖고 있으래요.’ 하나 마나 한 설명이긴 했다. 추론하기 어렵지 않고, 어쩌면 혜진과 만나 같이 집에 가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잘됐다, 날도 추운데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아도 되겠구나, 뭐 그런 시답잖은 결론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와 어울리진 않지만 입 밖으로 꺼내고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 한 인간은 그 어떤 불경한 상상도 자유로이 할 자유가 있었고 혜진도 그랬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제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사실대로 말해줘야지. 그들 사이에 일과 관련 없는 서로의 신변에 관해 묻는 대화가 길게 이어진 적이 없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주인과 손님의 뒤바뀐 위치는 집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혜진이 습관처럼 보조 걸쇠까지 걸어 문을 잠그는 동안 남자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신발을 벗었다. 혜진이 무엇을 하든 관심을 두지 않는 그는 혜진의 행동을 모두 예상한다기보단 혜진이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알기에 신경 쓰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혜진이 해 봤자 무엇을 하겠는가. 문을 잠그거나, 잠그지 않거나, 멋대로 찾아오거나, 찾아오지 않거나, 그 정도겠지. 강민이 아는 혜진은 자의대로 행동해도 어른들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학습된 공포와 무력함이 그를 좀먹고 있었고 그도 그 사실을 알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눈앞의 남자도, 어른들도 알지 못하는 게 있다면 새장 밖으로 나갈 생각 하지 않는 새도 창살을 구부러뜨릴 줄은 안다는 것이리라. 혜진은 아직 누군가의 안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 강민을 찾아오면서 미리 연락하는 짓 따위 하지 않았다. 전달해야 하는 지령이 있지만, 기한이 있으니 오늘은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거기까진 알지 못하겠지. 혜진은 낑낑대며 벗은 부츠를 아무렇게나 벗어둔 남자의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남자의 구두는 흐트러진 채로 가만히 둔다.
그의 집은 일반 가정집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다란 소파, TV, 라디오, 벽에 걸린 사진과 그림 액자들. 그러나 사진 속 가족의 모습에 강민은 없었다. 사실 사진 속 어느 인물도 강민을 닮지 않았다. 테이블과 책장을 장식하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품들은 몇 달 전만 해도 어느 신도가 애지중지 아끼며 관리하고 있었다. 강민은 가구까지 통째로 받아낸 배교자의 집에 머물며 손댈 이유가 없는 물건들은 전혀 건들지 않았다. 덕분에 하얀 먼지가 쌓인 액자와 누렇게 시들어 죽어버린 산세베리아는 전 주인의 최후를 짐작게 했다. 인적 드문 곳에 매장된 그는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소파엔 자주 눕거나 앉는지 먼지가 없었다. 혜진은 다리를 꼬고 앉아 코트를 벗어 걸고 돌아온 강민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커피라도 한 잔 내오지 그래요?”
그제야 좀 표정에 변화가 생기는 남자였다. 혜진은 그제야 좀 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강민 씨는 사후세계가 생각해요?”
그들의 종교관에 의문을 품는 질문을 망설임 없이 던질 수 있는 이유는 강민이 자신의 집에 도청기 같은 걸 남겨두지 않았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었다. 죽은 전 주인이 쓰던 식기를 찜찜하게 여길 성격이 아니기에 강민이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온 머그잔엔 각각 토끼와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고, 혜진은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혜진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글쎄.”
용건 없는 방문이 계속되자 그의 얼굴에도 슬슬 포기하는 기색이 어렸고, 그런 얼굴을 관찰하는 것이 혜진의 취미가 되었다.
“의외네요. 그런 건 없다고 곧바로 대꾸할 줄 알았는데.”
이과잖아요. 공대생. 이과. 혜진은 그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을 때까지 관련된 단어를 툭툭 던지길 반복했다. 그가 저의 과거를 아는 체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재촉하면 차라리 빨리 대답하고 대화를 끝내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설계하는 무대와 거기서 떠들어대는 장광설을 생각하면 꼴이 웃기지만, 오래전 그것에 관해 지적했을 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 상황엔 그것이 필요했다고 담담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을 의욕이 날아가 버렸다. 이해 못 할 연출 의도엔 관심을 끄는 것이 정신에 이롭다.
“증명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와, 정말 공대생 같다. 그건……. 시시하네요. 재미없어.”
“네 비위를 맞춰줄 생각은 없으니까.”
증명할 수 없으니 단언하지 않는다. 단언할 가치도 없다. 설탕을 조금도 넣지 않은 커피는 썼고, 혜진의 취향은 아니었으나 불평한 적은 없었다. 만약 혜진이 다른 커피도 구비해두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리할까? 하지만 혜진이 강민을 찾아가는 것에 주기는 없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이대로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며, 이 집도 언제든 처분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숨도 마찬가지였다. 처분 대상으로 지정되는 것은 평신도와 간부를 가리지 않았다.
어느 종교의 경전에 적힌 바에 따르면 그들의 천국도 그러하더랬다. 오히려 부자일수록 천국에 가기 어렵다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했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하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혜진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다. 아마 어떤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잊은 것일 테고, 어떤 것은 조금도 기억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몸부림쳐, 머리를 벽에 내리쳐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부자일수록 천국에 가기 어렵다면 가난한 사람은 가기 쉬운가? 혜진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은 만큼 가진 것도 많지 않다. 그가 온전히 가진 것은 누군가가 떨어뜨린 주인 없는 물건이다. 물건의 주인은 천국에 갔는가? 천국은 대체 누가 가는가?
“만약 지금 당장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맞고 죽는다면 난 어디로 갈까요?”
그는 빈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천국은 아니겠지.”
심드렁한 말에 괜히 심통이 났다.
“어마, 정말 빈말이라도 좋게 할 줄 모르네. 그러는 강민 씨도 천국엔 당연히 못 가겠지만요. 딱히 바라진 않는데, 같은 대답은 사절할게요. 대꾸할 생각도 없겠죠.”
과연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혜진은 괜히 심통을 부린 걸 알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어른들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차갑고, 말수도 적고, 무리에 어울리려 하지 않는 그에게 관심을 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무수히 다양한 곳에서 밀려오는 가운데 이런 사람이 오직 그 하나뿐일 리 없는 게 당연하고, 무대를 설계하고 사람들을 그곳에 배치하는 것도 그 하나만이 벌이는 일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이 지긋지긋한 혜진은 설령 그가 짐승의 무리 속 유난히 돋보이는 괴물이라 어른들의 관심을 받고 있어도 먼저 다가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가갈 이유가 없다. 지금에 와선 그와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 적당히 지루하고 흥미로워 조금은 즐기고 있지만, 그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기보다는 이러한 상황에 자신을 던져 넣는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게 즐겁다. 혜진은 언제나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 일감을 처리했고, 잔이 비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잔이 비지 않았다. 혜진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기로 한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천국에 못 가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치면, 지옥은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저번 주 예배 주제가 죽음이었나 보지. 평소보다 꺼내는 화제가 많은 걸 보니.”
“예배에 한 번도 나온 적 없으면서 아는 체하기는. 늘 그렇거든요? 아무튼 새삼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났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핼러윈 호박 머리의 유래 같은 걸 말하려는 거예요.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안 받아줘서 영혼이 떠돈다는 이야기, 알죠? 뒷이야기는 모르지만 그러다 아마 사라지는 걸 테죠. 사후세계가 없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예요. 내가 거기 못 속할 것 같다, 그런 거죠. 그럴 자격도 없어서.”
끝없는 안락이어도, 고통이어도 영원히 지속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평소처럼 자려고 누운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잠들기 두려워지는 순간이 혜진에겐 자주 찾아왔다. 눈을 감고 생각을 계속하다 어느 순간 잠이 들면, 잠이 들듯 죽어버리면, 지금 의식하고 있는 나의 의식은 그대로 사라지는가? 끝없이 고통받아야 하는 지옥에선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절대 닿을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천국의 풍요를 지켜보는 것만이 허용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이 더욱 심중에 큰 고통을 줄 것이기에, 때는 지났고 너희는 이제 두 번 다시 용서받지 못하리라. 지옥은 죄의 삯을 치르는 곳이라고 하였다. 혜진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자신이 치러야 할 삯을, 그 값을 매긴 죄를 떠올리곤 하였다. 그리고 아마, 영원은 그에게 사치일 것이다. 그의 죄엔 그게 가장 공평할 것이다.
그게 죄가 된 까닭은 그가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믿음을 잃은 그는 광신도가 되지 못하여 마음에 지옥을 가지게 되었다. 빠져나가기엔 너무 늦어버려서, 모조리 놓아 버리기엔 이지를 잃지 못해서 이곳의 지옥도 저곳의 지옥도 아닌 저만의 지옥을 끌어당기어 안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잃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정확히는 무엇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더는 도망치지 못하게 내 머리를 잡아끈다. 하염없이 지켜보게 하여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직시하라, 죄를. 죽음을. 그러다 강민과 눈이 마주친 순간 혜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고 그랬기에 속으로 웃었다. 이 상황에 일조한 그도 혜진에게 책임이 있다. 계기의 계기. 계기의 계기의 계기였다. 그들의 관계는 딱 그 정도의 거리를 두지 않는 이상 성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상정하고 형성한 거리였기 때문이다. 상정하고 형성하고 가정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에 진심이 있는가 하면 우습고, 모든 게 연기인가 하면 세상이 다 연기 같다.
의미가 없다. 아무도 없다. 머그잔이 빈 걸 안 혜진이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네가 그렇다면 나도 다르지 않겠군.”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조금도 꾸미지 않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가 대꾸할 줄은 전혀 몰랐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렇지 않나. 죄의 경중을 따져 봐.”
“당신은, 죄라고 생각해요? 죄라고 생각하면서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요?”
조금 울컥하여 쏘아붙이듯 말을 하는데, 마치고 나자 대답을 알았다. 스스로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걸 알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을 때, 혜진은 그날 처음으로 저를 보고 작게 웃는 그를 볼 수 있었다. 타인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은 곧잘 자신 역시 타인에게 관찰되고 있음을 잊어버린다. 혜진은 문득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그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무언가 많이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방금 그들이 나눈 질문과 답변과는 관계없었다. 늘 그랬듯이 그들이 서로에게 접근하는 데 필요한 건 본질이 아닌 그것을 둘러싼 상황이었으므로, 어떤 질문이고 어떤 질문에 관한 답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렇기에 무엇에 관해 알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에 관해서인지, 자신에 관해서인지. 다만 지루함과 흥미로움이 반복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즐겁고, 조금 더 괴로울 것 같은 건, 그것이 그들이 지금껏 서로 외면하여 보지 않은 본질을, 바탕을 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 이야기 듣겠다고 한 거 후회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어쩌면 반대로. ‘네 이야기 듣겠다고 한 거 후회해.’ ‘나도요.’
그러나 그들에겐 시간이 없었고, 더 많은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으며, 따라서 알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러므로 혜진은 그에게 묻지 않은 질문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는 곧 그자의 죄이니 세상 무엇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 만약 그자에게 죄가 없으면 그는 어떻게 되느냐, 그런 것이었다. 존재가 부정당한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죽는가, 추락하는가. 지워진 질문은 다시 말해지지 않았고 혜진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땐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니까 세상엔 나보다 더 흉악한 당신 같은 사람도 있으니 사서 걱정할 것 없다는 쪽으로요. 대꾸하지 말아요. 이번엔 헛소리도 정도껏 하라고 할 것 같으니까. 커피 잘 마셨어요.”
두 번이나 발언권을 뺏긴 얼굴은 볼만했고 혜진은 기분이 상당히 나아졌음을 느꼈다. 혜진은 다음에 또 보자느니, 밥 한 끼 사라느니 하는 예의상 하는 인사를 얹은 적이 잘 없으나, 그날은 평소보다 좀 더 길게 말을 늘렸다. 그가 기억할 것으로 기대하진 않았다. 본인도 그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으레 이런 관계에서는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는 법이었으므로 혜진은 만족하고 떠났다.
이윽고 남자의 세상은 천천히 이지러지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윙윙거리는 소리로 넘쳐나고, 무슨 말을 해보려고 해도 들리지 않아 자신이 정말로 소리를 내어 말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망가진 귀만큼 목 역시 그러했기에, 실제로 그는 어떤 소리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이제는 앞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고, 누구든 즉사했을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숨을 놓지 못했다. 그러나 곧 끊어질 붉은 숨이었으므로 어느 순간에 멈춰도 갑작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떠도는가 사라지는가 하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것이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