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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해맞이

  • gwachaeso
  • 3월 28일
  • 4분 분량

<WT>

리퀘스트



12월 31일이 지나면 1월 1일이 온다. 2월 28일 뒤에는 가끔 2월 29일이 오기도 하지만, 12월은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31일까지다. 4년이 지나든 8년이 지나든 32일이 오는 일은 없다. 절대. 12월 31일이 지나면 1월 1일이 오고 1월 1일이 되면 연도가 바뀐다. 숫자가 하나 더 더해지고, 생일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오느냐에 따라 나이를 한 살 더 먹기도 한다. 어느 나라에서는 해가 바뀌는 것이 나이를 먹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어느 땅이든, 어느 세상이든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면 살아있는 사람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일 테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나이를 먹고, 자라고, 늙어간다. 살아있지 않은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다.


쿠가 유마는 자라지 않는다. 늙지도 않는다.

쿠가 유마는 살아있는 사람인가?

쿠가 유마는…….


어쩌면 블랙 트리거를 너무 얕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사이드 이펙트를 가질 정도로 높은 트리온 수치를 가졌던 아버지 쿠가 유고를 얕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만든 블랙 트리거였으니, 그런 사람이 만들어준 또 다른 몸이었으니, 약하게 만들진 않았으리다. 그건 알았지만. 허술히 만들지도 않았으리다. 그럴 거라 예상했지만.


아버지, 대체 언제까지야?

대체 얼마만큼의 수명을 내게 남겨준 거야?


쿠가 유마의 문제는 쿠가 유고가 남긴 블랙 트리거에 가둬둔 그의 진짜 육신의 수명이 언제 다할지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문제는 유효한 채였다. 쿠가 유마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한다. 오늘 죽을 수도, 일주일 후에 죽을 수도 있는 불안하지 않은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길 그치지 않으며 살고 있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네이버후드에서 쿠가 유마의 목숨은 그런 불안정을 안고 있음에도 끝이 오기 직전까지는 언제나 여분의 목숨을 안고 있는 셈이니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쟁까진 일어나지 않는 이곳 미카도시에서 쿠가 유마는 솔직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대다수의 사람보다 제 죽음이 더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그리 오만한 착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그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지 않나. 그래서 솔직히, 이 역시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쿠가 유마는 아프토크라톨의 최초 침공, 곧 제2차 미카도시 대침공에서 미쿠모 오사무의 목숨이 위험해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사귄 그의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아마 높은 확률로 제가 먼저 친구들을 떠나게 될 테니까. 또, 그럴 수 있도록 제가 친구들을 지킬 테니까. 그렇게 마음먹으며 친구들 곁에 머무른 지난 세월이었다. 세월이라고 불러도 좋은 시간일까? 의문을 가지기엔 새삼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일 년, 또 일 년.


“곧 1월 1일이야. 30분도 남지 않았어.”


침대에 누운 자에게선 색색대는 숨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쿠가 유마가 그 손을 잡았을 때, 느리지만 그 손에 힘을 들여 쿠가 유마의 손을 맞잡아주어 쿠가 유마는 그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입원실에는 커다란 TV가 놓여 있었고 그곳엔 화려하게 장식된 거리와 나무들이 전구를 매달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쿠가 유마는 사실 리포터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에 불과했다. 시계를 볼 여유가 있진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들고 가쁜 숨으로 빠르게 말을 잇는 리포터 덕분에 지금 시각이 열한 시 반인 것을 알았다. 곧 자정이 될 것이다. 졸음이 밀려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각이지만 쿠가 유마는 오늘따라 침대에 누운 친구를 재우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이니까. 다른 날이면 몰라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이지 않은가. 물론 쿠가 유마에게는 조금의 졸음도 찾아오지 않는다. 이런 몸이 된 후로 쿠가 유마는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다른 이들보다 많은 시간을 선사해 주었지만, 그만큼의 외로움도 선물해 주었다. 완벽하기만 한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지. 완벽한 것을 기대한 적도 없지만. 또, 완벽하지 않을 줄도 알았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약하게 그리고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그의 그 아버지가 만들어 준 신체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그를 얕본 모양이지. 그가 쿠가 유마에게 남겨둔 수명은 생각보다 길었다. 자라지도, 늙지도 않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쿠가 유마는 과연 사람인가?


“사람이야.”


그 말을 해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한다고 놀리지 않고, 그렇다고 꾸짖지도 않고, 차분히, 물컵에 물을 따르며 그런 말을 해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너는 사람이야. 너는 살아있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만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래서 쿠가 유마도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했다며 너스레를 떠는 일 없이 대답했다. 응. 그렇구나. 고마워, 오사무. 진실로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자 미소 짓는 소년이 있었다. 청년이 있었고, 그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 나이를 먹었다. 자랐고, 늙었고……. 12월 31일 같은 날이 오면 모두가 쿠가 유마와 함께 밤을 새워 주었다. 처음, 아버지 쿠가 유고를 블랙 트리거에서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쿠가 유마는 이 별을 떠나려고 했었다. 레플리카를 아프토크라톨에게 잃었을 때는 그들과 함께하여 원정을 떠나는 걸 목표로 했었다. 모든 여행과 모든 목적이 완수된 후에도 쿠가 유마는 미카도시로 친구들과 함께 돌아왔다. 미카도시로, 보더로. 타마코마 지부로. 타마코마 지부는 쿠가 유마에게도 집이 되었는가? 고향이 되었는가? 어차피 떠돌아다닌 네이버후드의 별 어디에도 쿠가 유마의 고향은 없었다. 그런 건 쿠가 유고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럼 스스로 정하면 그만이지. 쿠가 유마가 선택하면 되는 일.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후회 없이 살아온 쿠가 유마는 오늘도, 지금도 살아있었다. 살고 있었다. 미카도시에, 보더에, 타마코마 지부에. 나이를 먹지 않아도. 자라지 않아도. 늙지 않아도. 그는 계속 살아있었다. 계속, 계속. 아, 그럼에도 어린 날의 나 자신이여. 너는 제법 오만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을 먼저 떠날 줄 알았다고?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고? 무리한 착각은 아니지만, 오만하긴 했을지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좀 더 나았을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에 이르러선.


점차 약해지는 숨소리가 있다. 마지막엔 모두가 함께 있을 예정이지만 그러기 전에 오랜 친구로서 둘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부탁한 것을 모두가 들어준 덕분이었다. 물론, 쿠가 유마의 발치에는 그러든 말든 꿋꿋이 남은 작은 갈색 생명체도 남아있다. 본래라면 병원에 절대 출입 금지겠지만, 오늘만큼은 다행히 몰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몰래였다. 들키면 안 되니 발치에, 침대 아래에 있어야 해. 거기까지는 말을 알아들어 주어 다행이었다. 검은 눈망울을 감아 숨기는 그건 잠들었는지 소리가 없었다. 어떻게 될까. 너도 내 곁을 떠나게 될까? 알 수 없지만, 그런 건 그로선 알 수 없지만, 손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이 있어 쿠가 유마는 다시 친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졸리다고? 톡톡. TV, 꺼줬으면 좋겠어? 톡톡톡. 말을 하기 힘들어졌을 때부터 대화는 손끝으로 이루어졌다. 알았어. 불도 끄는 게 좋을까? 톡톡. 쿠가 유마는 미소 지은 채로 한 번 더 친구의 손을 쓸고는 손을 놓았다. 알았어. 나도 나가볼게. 좋은 꿈 꿔.


“잘자. 요타로.”


나의 오랜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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