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
- gwachaeso
- 3월 20일
- 3분 분량
<회색도시>
KS님 <길모퉁이> 팬아트
길모퉁이를 도니 그 애가 있었다.
은창은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줄도 알았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던 그였고, 지금도 그곳이 어디인지 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은창의 곁에는 그 애가 있었다. 그 애가 있었으니 은창에겐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 이유. 은창이 잃은 것은 그 하나밖에 없었다. 이유를 잃고 그 애를 받은 은창은 그 애를 집으로 데려왔고, 아, 집이라고 하니 말이다. 은창에겐 집이 없었다. 그곳을 집이라고 부른 적도 한번 없었다. 그런데 그 애가,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라고 묻기에 은창은 대답했다. 집.
집으로 갈 거야. 은서야.
그렇게 여관방은 은창의 집이 되었다. 그렇게 은창에게 집이 생겼다. 은창은 은서를 집으로 데려갔고, 대충 치우긴 했지만 성에 차지 않는 바닥 대신 침대 가장자리에 그 애를 앉혔다. 가만히 있어. 잠시 후 대야에 물을 받아 돌아온 은창은 그 애의 발치에 앉아 소매를 걷었다. 그런 뒤 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씻겼다. 길모퉁이에 맨발로 서 있었던 아이를 은창은 자신의 등에 업어 이곳까지 데려왔다. 집까지 데려왔다. 은서야. 응, 오빠. 정은서. 응, 오빠. 그러나 은창은 은서를 부르지 않았다. 왜? 그래서 은서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너 또 신발은 어디다 흘리고 돌아다닌 거야? 은창은 절대로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찰박이며 닦아낸 대야 속 물은 거무룩하게 흐려져 있다. 미안, 오빠. 그렇기에 은서도 사과하지 않는다.
집에다 두고 나왔어.
집에다 두고 나왔어…….
아, 그것은 오래도록 은창이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말이었으나 영원히 듣지 못할 줄 안 말이었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순간이 깨어질 것을 안 은창은 아무것도 묻지 않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은서야. 다만 동생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는데, 그러자 그 애가 응, 오빠. 왜? 그러며 웃었고, 웃는 그 애가 이곳에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도 이 아이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애가 그곳에 없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때쯤 은창에겐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는데 저를 찾는 전화에 은창은 왜? 라고 되묻기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왜? 은창은 더는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 왜? 은창은 더는 그들 말에 따를 이유가 없었다. 왜? 은창은 이제…….
나중에 듣기로 은창은 대야 앞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처음 그를 발견한 사람은 쓰러진 은창과 그 앞에 놓인 대야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그 안을 채운 게 그저 흙탕물인 것을 알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전화 받으면서 이 새끼 미쳤나?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진짜 미친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일행과 함께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왔다는 그는 돈 대신 청구서를 은창의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근데 대야는 뭐냐? 바닥이라도 청소했냐? 찜찜했지만 달리 적당한 용기가 없어서 헹구고 다시 썼다는 대야 가장자리엔 이제 물수건 하나가 덜렁 걸려 있었다. 그냥……. 그냥? 그냥 대야. 미쳤구먼, 아직도. 야, 아무튼 형님에겐 내가 대충 둘러댔으니까 너 나한테 빚진 거나 잊지 마라. 엉? 정은창. 그렇다고 빈속에 약 먹지는 말고. 아, 쟤가 애야? 얼른 가자니까, 그러네. 그래. 그래…….
문이 닫혔다. 그때까지도 다시 뜬 눈을 감지 않았던 은창은 그때가 되어서도 뜬 눈을 다시 감지 않았다. 감으면 잊게 될까 겁나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감으면 잠들까 봐 걱정되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겁난다니, 역시 아직은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된다니, 무엇을 걱정한단 말이냐? 아, 그렇다고 해도 겁낼 수밖에. 걱정할 수밖에. 은창에겐 그래야만 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아무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은창에게 말할 수 없었다.
집에다 두고 나온 게 있었다.
은창에겐, 길모퉁이를 돌면 무너진 집이 있었다.
무너진 집에는, 은창의…….
은창의…….
은창은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여전히 은창에게 중요했으며 은창을 그것을 해내기 위해 길을 떠났고 지금도 그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았다. 지금 은창의 곁에는 그 애가 없었다. 그 애가 없었으니 은창에겐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곳. 집. 은창이 잃은 것은 고작해야 모든 것밖에 없었다. 모든 것.
그 애를 잃고 이유도 잃은 은창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 집이라고 하니 말이다. 은창에겐 집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