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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Post-it

  • gwachaeso
  • 3일 전
  • 3분 분량

<WT>

우루로쿠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접착제가 붙은 메모지 ‘포스트잇(Post-it)’은 미국의 ‘3M사’에서 만든 상품명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어느 날인가에 우루시마 와타루가 로쿠타 리카에게 두툼한 그것―메모지―그러니까 포스트잇 뭉치와 볼펜을 내밀었을 때, 로쿠타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루시마의 눈치를 살폈더랬다. 사실 그에게 어려운 건 평행 처리뿐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정확히는 ‘일’의 평행 처리뿐만이 아니다. 아니? 여전히 ‘일’의 연속일지도? ‘생각’의 평행 처리. ‘감정’의 평행 처리. 일이란 어떤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이루려고 하는 대상 또는 어떤 내용을 가진 상황이나 장면을 뜻한다. 따라 생각하는 것도, 감정을 처리하는 것도 모두 일이니 사실상 일상의 모든 것이 평행하게 처리되고 있으며 로쿠타의 일상도 마찬가지였다. 즉, ‘일’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건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과 같았다.


그 가운데 로쿠타에게 우루시마가 건넨 메모지는 로쿠타에게 적잖은 도움이 되었더랬다.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작은 메모지는 이제 로쿠타의 일상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물이 되었다. 소리는 금세 흩어지니 눈으로 몇 번이고 확인할 수 있도록 메모하면 된다. 당연하게도 우루시마가 그렇게까지 구체적이고 친절하며 다정한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일상의 혼란을 전부는 아니라도 조금은 덜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로쿠타는 우루시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우루시마가 ‘이런 방식’으로 로쿠타에게 도움을 건네는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으므로.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면, 그건 그럴지도. 조금 많이 미안할지도.


메모지는 이후 수첩에 붙여 정리했다. 수첩을 보는 것을 잊지 않는 한 로쿠타는 제법 남들과 비슷하게, 조금 느릴지라도 근사한 오차의 속도로 일과를 처리할 수 있었다. 다가오는 주말, 우루시마와의 약속도 메모지에 적은 뒤 수첩에 단단히 붙여두었다. 잊지 말아야지, 하면서. 수첩을 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야, 로쿠타는 우루시마와의 약속을 잊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응, 할 수 있어.


할 수 있기는. 수첩 위로 엎지른 물컵 때문에 온통 얼룩진 수첩을 말리다 로쿠타는 자신이 수첩을 봐야 한다는 사실까지 잊고 말았다. 수첩에 적힌 약속도.


“우루시마, 미안해……!”


깨달았을 땐 약속 시각으로부터 20분 정도 늦었을 때다. 다시 말해 약속 장소까지 이동하는 30분을 포함하면 1시간 정도 늦을 ‘예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딱 두 통의 메일을 10분 간격으로 하나씩 보내는 것으로 로쿠타를 기다린 우루시마는 로쿠타가 허겁지겁 전화를 걸고, 전화를 끊고,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가 전철역 개찰구에 도착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전철을 타는 일련의 과정에서 소비된 시간을 포함한 약 1시간을 약속 장소에서 이동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런 행동, 가능할까 보냐. 장난해? 느려 터진 굼벵이처럼 행동한 게 자랑이야? 내가 왜 너를 기다려야 하지? 아무튼 이런 모난 말들. 모난 말들을 하는 데 우루시마는 거리낌이 없었다. 상층부 앞에서도 당당하기 짝이 없어 가끔은 로쿠타가 우루시마를 붙잡아 말릴 정도로.


하지만 로쿠타에겐 그다지 모나지 않은 듯도 하다. 휴대전화를 톡톡 건드리며 화단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우루시마 앞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로쿠타가 도착했을 때 우루시마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나서가 아니라 지금 말을 걸어 봤자 숨이 찬 로쿠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로쿠타의 숨이 얼추 진정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로쿠타가 다시 한번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하자 귀찮은 것을 떼듯 손을 저어 멈춘 뒤였다. 자, 그럼 이제 그를 매도하면 되는 걸까? 그럴 리가. 우루시마가 로쿠타를?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바지에 먼지와 모래가 묻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앉았다가 신경 쓰지 않고 내려선 우루시마가 로쿠타에게 할 말이란 이러하다.


“가자.”

“으응……!”


앞서가는 우루시마를 따라가는 로쿠타는 우루시마보다 딱 두 걸음 뒤처지는 정도를 유지하며 그에게 다가붙는다. 우루시마의 보폭이 로쿠타의 것보다 훨씬 크고 빠른데도 로쿠타는 그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로쿠타는 평행 처리를 하는 데 서툴고, 이는 곧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평행 처리. 감정의 평행 처리.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포스트잇은 로쿠타에게 제법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스트잇으로 정리하진 못했다. 붙이기 시작하니 떼어내지 못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떼어낼 수 없는 생각. 떼어낼 수 없는 감정. 그런 감정이.


로쿠타의 수첩에 한 장 한 장 내려앉는다. 오늘도.

로쿠타 안에도, 한 장 한 장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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