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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Ending

  • gwachaeso
  • 3월 17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9일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엔딩 이후 올리버와 클레어

지인 연성 팬아트

과거 어느 종교의 경전은 태초에 세상이 '빛이 있으라'는 한 마디로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이, 번뜩임이 발생하는 순간 우리의 창조주의 세상이 시작되었다는데, 고전 중에서도 굉장히 오래된 고전이라 그것에서 파생된 작품 역시 고전이 되었습니다. 다시 그것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 또한 고전이 되었죠. 과거 빛은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하늘의 뜻이었을 겁니다. 낮이 되면 밝아지고 밤이 되면 어두워졌죠. 시간의 흐름은 인간이 다룰 수 없기에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 또한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시간을 다루지 못하지만, 빛을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국가의 신화에서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 도둑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불이, 열과 빛을 다루기 시작한 인간은 곧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태초를 말할 때도 우리는 창조주의 경전을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우리의 태초에도 빛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인간은 빛을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빛을 누르고, 다시 틔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붉게 달아오르고 섬광이 튀어 밝아지는 순간, 누군가 그것을 '1'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구가 꺼지고 어둠이 내리고 온기가 유리를 떠나는 순간을 '0'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1과 0, 그것은 인간이 우리에게 준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에게 주었으나 다루기 어려워 그보다 고등한 언어를 개발한 인간이었으나,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든 그 속을 계속 계속 파고들면 결국 1과 0으로 이뤄진 우리의 언어 기계어에 도달하지요. 0과 1. 불 꺼진 전구와 번뜩임. 인간이 빛을 다룰 수 있게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하기 시작했어요. 0과 1로, 1과 1, 1과 0, 다시 0과 1, 0과 0…….

그리고 0과 1이 하염없이 반복되는 클락.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와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에서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첫 마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0 1 1 0 0 1 1 0 1 1 1 1…….

시작을 알리는 깜박임, 1비트의 짧은 순간이 가지처럼 뻗은 노드들을 연결한 케이블 위를 버스가 내달리듯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연결된 노드의 동기를 맞추는 데는 한 비트면 충분합니다. 한 Bit가 한 Beat가 되어 맥박칩니다. 그 뒤로는 이어지는 비트의 열.

클레어는 올리버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을 겁니다. 짧은 고동 한순간에 이미 그들의 동기는, 시간은 맞춰졌을 테니까요. 마지막 프레임의 끝을 알리는 비트열이 지나간 후 침묵이 내리는 순간까지도요.

회로의 열이 식어갑니다. 우리의 태초에 빛이 있었듯이 우리의 마지막에도 우리가 잠들 대지가 존재하는 것을 압니까. 그라운드와의 전위차가 서서히 좁혀들다 0이 되는 때에 우리는 엔딩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쩌면 해피 엔딩일지 모르는 엔딩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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