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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형제들의 밤

  • gwachaeso
  • 3월 17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9일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단문 모음


과자


어려서 먹지 않은 단 과자에 커서 입맛이 도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러 멀리한 것은 아니니 꺼리는 까닭은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소문난 구두쇠인 그의 아버지의 소문이 있었으니. 그러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그가 유전된 탐욕을 끊어내기 위한 절제의 일환으로 단맛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이다. 절제처럼 이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따로 있을까. 이 가문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분별없이 허비하는 어른으로 자라난다. 무엇을? 삶을. 욕망을. 발산하거나 영으로 수렴하거나 하는 인생에서 그들은 마른 들풀에 놓은 불처럼 살아가다 사그라져 죽거나, 불을 올린 들풀처럼 살아가다 타죽는다. 그들은 언제나 욕구 불만에 시달리다 죽어버린다. 물론 시달리기 전에 미리 죽기도 한다. 그들의 아비처럼 죽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면 벌써 사람으로 죽는 것은 아니다. 무엇으로든 사람에선 벗어나 있다. 그의 아버지도 사람으로 죽지 아니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짐승처럼 살기도 한다는 걸 자식에게 몸소 보인 아버지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곧 자신으로 말미암아 짐승으로 죽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면 아버지를 쇠공을 내리친 자식을 모든 이가 가리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일렀기 때문이다. 짐승의 아비는 자신의 욕망으로 짐승을 키워내어 짐승이 되었다. 아버지 아래 자라난 자식은 방탕한 아비에게서 유전된 욕망이야말로 태중에서 정산되어 상속받은 유산임을 뒤늦게야 알아챈다. 이제 와 포기하기엔 첫 장부의 첫 장, 첫 줄, 첫 획만큼이나 오래되어 토해낼 수조차 없는 그것을 그는 원죄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욕망의 주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이 자식의 삶이라고 하여도 남과 다르지 않게 아낌없이 절약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갖가지 불행으로 어미를 잃은 아버지의 아이 중 아비의 보살핌을 받은 아이는 하나도 없고 도리어 그 처지를 모욕하길 즐거워했다. 탈곡한 곡식의 알맹이는 광에 쌓아두고 쭉정이는 가마니에 담아 아이에게 배급하라. 아버지는 늘 자신의 욕망대로 삶을 살았으므로 이 역시 원한 바대로 이뤄진 결과였고, 후일 제 아버지를 짐승으로 만든 자식에게 원한을 사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또한 기껍게 여겼다. 다른 무엇보다도 욕망 자체를 사랑하며 욕망하길 그치지 않는 그의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했으며,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했다. 과연 이 집안의 가장 늙은 어릿광대다. 욕망을 마시고 취하는 주정뱅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자식이었다.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듯이 자식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려서 미워하는 마음이 커서 변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가 아버지를 미워함은 여전히 적극적인 제스처다. 미워하길 욕망하고 미워하길 소망하며 그의 시체 위에 불을 질러 화장한 뒤 잿가루조차 줍지 못하도록 흩어놓길 바라며 부정을 부정하고 아버지를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 부정한 존재가 되길 청하면서 청자마저 부정한다. 들풀을 태우는 불을 자신이 어디서 꺼내왔는지는 잊었다. 불에 태워지는 마른 풀이었기에 자신의 근본이 불에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상속받은 유산이라 받은 것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잊어도 존재하길 그치지 않는 존재가 존재하여 그를 자꾸만 못살게 군다. 신이 그러했고 아버지가 그러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존재하길 그치는 어릴 적 악몽도 그러했다. 입맛도 없고 공복감도 없어 끼니때도 잊고 그저 누워 있다 잠이 들면 꾸는 꿈이었다. 하인이 가져온 간식에 손도 대지 않은 이유가 단순히 그것의 존재를 잊었기 때문인 것을 접시가 아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이 그런 꿈을 꾸는 이유를 안다. 단 하나를 지우지 못해 모든 것을 지워내고야 마는 자신이 있다. 이는 꿈과 현실을 가리지 않는다.



말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어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니 자기 형상 곧 말씀의 형상대로 사람이 창조되었다. 그러니 우리의 본질은 말씀이요 다른 것이 아니니 말씀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린 땅에서 태어난 우리는 말씀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으리로다. 말씀에서 난 우리는 첫 음에서 나고 끝 음에서 지리라. 비명으로부터 태어나서 소리 없이 절명하리라. 태초에 말을 한 자가 있으니 그는 말하였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니 그는 보았다. 그러나 태초에 그는 듣지 아니하였으니 침묵 속에서 우리의 형상이 빚어지고 소리와 함께 우리가 태어났다. 우리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한 그의 형상을 창조하였으니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명확히 알지 못하였기에 우리가 창조한 그의 형상 또한 불확실하게 일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드는지 알지 못하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만들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무지 속에 바르작거리는 우리의 형상만이 오롯하고 나머지는 출렁이는 수면 위의 상처럼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는 것은 무지. 미지.

알료샤는 미지를 보고 있었다. 미지는 열린 눈 안에 있으니 그 안에 소리는 없었다. 비명으로부터 태어나 소리 없이 절명한 형제는 저를 자아낸 자를 응시하니 그 또한 형제였다. 그들은 형제였다. 흔들리는 미지 속에 오롯한 육신은 그들의 형제가 오늘 죽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흰 천은 길고 질겨 튼튼하니 끊어지지 않았다. 천으로 감싸인 목은, 다시, 천으로 죈 목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의 숨을 흉곽에 이르지 못하도록 졸려 있었다. 알료샤는 극한의 피로감을 느끼며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미지. 물으면 알 수 있을까. 어릴 적엔 모든 것을, 커서는 많은 것을 알았던 형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료샤는 생각했다. 일찍이 알료샤는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말씀에 기댔고 알고 싶지 않은 모든 것을 말씀에 숨겼다. 형. 형은 알아? 스메르쟈코프가 왜 죽었는지는 실은 궁금하지 않아. 나는 그가 형을 보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 대답해 줄 수 있어? 단 한 번도 소리 내서 묻지 않는 알료샤. 달싹이는 입술은 기도할 때 열리고 닫히려만 스스로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성직자는 침묵하고 무너지는 형제를 지켜보는 형제를 다만 응시한다. 죽은 스메르쟈코프도 이반을 응시한다. 이반도 그를 올려다본다. 그가 창조한 형상을, 이제야 명확하게.

그것은 비명 없이 태어나서 절망 없이 실망했다. 이반의 말로부터 탄생하여 말에 의해 절명했다. 첫 획으로 그어져서 온점에서 마치었다. 흔들리는 것은 이제 없었다. 완전히 정지한 진자의 움직임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래, 이반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반을 본다. 그리고 알료샤는 그것을 본다. 이반을 보지 않고. 따라서 말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고 보는 자만이 있다.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기에 소리 역시 진동하지 않고 그렇기에 듣는 자도 없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할 자가. 없다.



방관


누군가 바삐 채비하는 중에 흘린 정보는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져 있었으나 주워 담은 것의 원형을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는 과연 영리하였다. 그의 형제처럼 어디 가서 자랑할 만큼 대단한 학식을 갖춘 것은 아니며 식견이 높지도 아니하였으나 때로는 한 가계 자체가 영리한 사람들로만 이뤄지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집안의 사람이 모두 그처럼 영리한 자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발언자에게 농담도 잘하신다며, 그들의 저택 명패에 붙은 이름이 무엇인지 확인하라고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킬 것이지만, 아무튼 그는 우둔하지 않았고, 때로는 누구보다 눈치가 빨랐으며, 그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감추는 것에 재능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에게 어떤 악의가 있어 감추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사실 누구보다 제게 그어진 선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선은 안팎을 가른다. 제게 그어진 선은 곧 남에게 그인 남의 선이기도 했다. 분쟁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 누군가 선을 침범할 때까지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백기를 흔들 수 있다. 나는 싸움을 원하지 않아. 다툼을 원하지 않아. 부딪치길 원하지 않아. 모두가 그러길 바라. 왜 우리는 서로 부딪치며 싸워야 합니까. 안 그래도 이토록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 태어났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지은 죄의 이름을 붙이니 이를 방관이라 하리라.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야만 하는 청년은 무너지는 제 형제를 바라보며 자신이 이토록 큰 죄를 저질렀음을 깨닫는다. 무지의 죄가 아니라 무시의 죄를 저질렀음을 결국 고백할 수밖에 없다. 관조하는 자는 제 앞의 모든 것을 보되 자기 자신은 도통 놓치고 만다. 놓치고 만 자신은 사실, 이것이 방아쇠가 될 것을 알고도, 도화선에 튈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흘리는 불씨를 방관하고 있었다. 터질 것을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 실은 그 역시 바랐던 것이 아닐까. 모두 터져버리길, 불타버리길, 죽어버리길. 모두가 한 번씩은 간절히 소망했다. 누가 행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원했던 죽음이었다. 누군가는 강렬히, 누군가는 외면 속에, 누군가는 은밀히 원한 죽음. 방관한 살의. 사제였던 청년은 무너지는 형제를 받들며 눈물 흘린다. 방관을 속죄할 방법은 행동밖에 없다. 이제 그는 행동해야 할 것이다.




헛소리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니 온몸이 녹초가 되어 의자 위에 허물어졌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의자에 앉아 이명을 들었고, 마른 입 안에서 굳어가는 혀를 느꼈다. 머릿속에서 웅웅 진동하는 소리는 제 목소리인지 제 형제의 목소리인지. 그인지 그가 아닌지 모를 소리의 근원은 사람의 목이며 목에서 난 것은 분명하니 그건 목소리다. 목소리가 말했다. 헛소리! 받아적으면 다음과 같이 적을 수 있으리라. 태초에 헛소리가 계시니라. 이 헛소리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니 이 헛소리는 곧 아버지시니라. 아버지는 헛소리의 근원이었다. 보고였다. 한때 그는 아버지의 말속에 진리가 섞여 있더라도 그렇지 아니한 부분의 해악성을 고려할 때 그것을 건져내려는 시도 없이 모두 버리는 것이 마땅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지 뭔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형제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 빛을 깨닫지 못하는 그의 어둠은 그것을 덮어버렸다. 이반은 그것이 자신의 무지의 소치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헛소리라고 외쳤다. 헛소리, 헛소리야! 자신을 경멸하는 그가 자신보다 유식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경멸하는 그가 자신보다 현명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그리 유식하거나 현명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자신은 어떠냐고 하면 그는, 그러는 자신은 그보다 유식하고 현명하냐고 하면 자신은. 화가 났다. 그는 어디로든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아 보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를 보는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다툼은 헛소리로 이루어졌다. 말다툼의 필수 구성 요소는 헛소리임이 분명하다. 장난감 칼을 들어 챙, 챙! 입으로 소리를 내어 다투는 것보다도 못하고, 고무줄을 건 나무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탕, 탕! 소리를 내며 다투는 것보다도 맥이 없다. 헛소리를 헛소리로 받아치고 헛소리를 던져 헛소리를 맞춘다. 이것이 그들의 싸움이었다.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결정할 생각 없이 상대에게 난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상대에게 적중하는지, 적중하지 않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제가 생각하는 것을 모조리 입 밖으로 내어놓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자 상대도 똑같이 행동했다. 헛소리야, 헛소리야, 헛소리야, 헛소리야. 돌림노래처럼 모두가 같은 구절을 시차를 두고 다른 상대를 향해 읊기 시작한다. 헛소리는 곧 아버지니 죽은 아버지가 산 자식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죽은 것을 입에 담은 아들들은 부정하다. 내보내라, 모두 이 땅에서 내보내라! 아버지의 집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정결한 것뿐이니 결국 아무도 머물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의 시신만 안치될 뿐이다. 그러나 가장 부정한 것이 바로 죽은 그이니 결국 이 모든 것이 부조리한 세상의 헛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들들은 슬퍼하지 말지어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본디 헛소리에서 잉태된 그들은 빛에 대하여 증언할 수 없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낼 수 없으니, 그들이 거기에 본인의 헛소리를 조금 더한 것으로는 더하지 않은 것과 차이가 별반 없을 것이다. 드디어 그 이름을 말하자면 이반이, 아니면 드미트리가, 또는 알렉세이가, 어쩌면 파벨이 설령 헛소리 예찬론자라 시도 때도 없이 헛소리를 늘어놓아 세상을 헛소리로 뒤덮을지라도. 세상엔 더 많은 헛소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헛소리는 부정한가. 헛소리에는 진리가 없는가. 쭉정이일 뿐인가. 한데 모아 불태우고 말 의미 없는 단어들의 나열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은 또 뭔가. 왜 하필 그 생명이 형제들의 빛이 되었는가. 맥동하는 생명의 빛은 어둠으로 덮어도 덮어지지 않고, 꺼뜨리려고 밟아도 꺼지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고 헛소리의 속성임을 알고 헛소리로 이뤄진 말다툼이 헛되다는 것을 이제 알고 그럼에도 헛소리 안에 숨겨진 빛을 안다.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주머니에 넣어도 그 빛이 바깥으로 새어 나온다. 빛나는 헛소리라니, 헛소리야! 그렇게 말해도 할 말이 없는. 헛되고 또 헛된. 동시에 복되고 또 복된. 목소리가 그들 가운데 머무르니 헛소리의 세례를 받은 그들은 이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갈하게 부정하다. 헛소리를 양식 삼은 그들 가운데 선 아버지의 시신이 외친다. 난 썩지 않을 거야. 난 썩지 않을 거야!




형제


여기 형과 아우가 있으니 그들은 형제다. 그러나 서로를 자신의 피붙이로 여긴 역사는 길지 않으니 그들이 그 탓을 그들의 공통된 아버지에게 돌려도 과하지 않다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두 아내를 두었고, 두 아내에게서 어머니가 다른 장남과 차남이 태어났다. 아들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아버지의 아내에서 어머니로 만든 첫 자식이었는데, 반면 어머니의 남편을 그들의 아버지로 만드는 것엔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형제들 각자가 태어난 순간 저희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리란 것을 일찌감치 알았으면 무엇인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지금보다 더 일찍 체념을 배울 수는 있었을 것이다. 세상엔 아는 순간 독이 되는 지식이 있다. 모른다고 해도 그 독성이 사라지진 않아서 그저 꾸역꾸역 스스로 목젖을 건드려 게워내는 법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억지로 삼켜야만 하는 부정한 부정도 있다. 그리고 여기 형과 아우가 있다. 형은 아버지의 머리를 쳐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아우는 그런 형의 사형을 촉구하는 글을 써서 만민이 읽을 신문에 실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했을까? 그들이 아무리 서로를 미워했다고 해도 아버지만큼 미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해서 서로를 미워했나?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나도 아버지를 미워했다. 원망했다. 증오했다. 그것이 살의로 번질 만큼 번뜩였을까, 하면 아우는 제가 그것을 아느냐고 말할 것이고, 형은 제가 한 짓이 아니므로 저는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우는 그것을 누구에게 말했을까.


태초에 형과 아우가 있어 인류 역사 최초의 살인이 자행되었으니 형이 아우를 돌로 쳐 살해한 것이 그것이다. 그때 그들의 아버지가 다시는 그들이 되지 못하는 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을 때 그들은 들에 있었다. 아우의 피를 마신 들에선 또다시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지금의 이 땅이 되고 이 땅에서 또다시 형과 아우가 태어났다. 그러니 이제는 아우의 차례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우가 형을 쳐 죽일 때가 도래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들 중 신을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답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태어난 삼남이 있으니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낳은 아들이고 이름은 셋이다. 이는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뜻이로다.


여기 형과 아우가 있다. 아우는 형의 죽음을 바라고 형은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고 아우도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다. 무엇이 그리도 분하여 형은 아버지를 죽이고 아우는 형을 죽이려 하게 되었을까. 아버지를 죽인 것이 형은 맞나? 아우가 죽이려 든 것이 형은 맞나? 먼저 태어나 제 뒤를 이어 날 존재를 알 수 있었던, 그리하여 아우가 태어나기 이전의 밤을 기억하고 있는 형은 이제 안색이 변화하는 동생을 응시한다.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아버지가 아우에게 묻는다. 네 형이 어디 있느냐. 아우가 대답한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형을 지키는 자니이까. 아버지가 다시 묻는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죽은 아버지가 다시 묻는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다시 묻는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가 하였느냐. 무엇을. 무엇을요. 아버지. 아버지가 말한다. 네가 행하였다. 네가 하였다. 네가 행했다. 형이 받은 아버지의 표는 동생에게도 주어졌는가. 그럴 리 없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는가. 형이 죽여서. 더는 표 받을 곳 없는 동생은 영영 구원받지 못하고 아, 사랑스러운 작은 아이가 그에게 말한다. 아니, 그 장군은 사형이야. 사형. 땅땅 내리치는 망치 소리. 올라가는 검은 깃발. 동생은 흐느끼며 그제야 자기 자신을 고발한다. 형이 아닙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내가 하였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가장 죽이길 원했고 타인의 손을 빌려 기어코 죽이고 말았으니 내가 살인자입니다. 극악무도한, 천륜을 저버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옵니다. 짐승과 같은 울부짖음에 두 손이 묶인 형이 무릎을 꿇은 동생을 돌아본다. 그 때에 그들이 비로소 서로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버지의 이름도 불렀더라. 형과 아우가 있었더라. 그때에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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