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今日)
- gwachaeso
- 3월 19일
- 2분 분량
<주술회전>
히구루마 히로미. 지인께 선물한 단문
변호인은 한정된 예산과 인원수로 움직이고 검찰은 세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증거를 잡아내는 방식으로 변호인을 상대한다. 검찰에 대응해야 하는 변호인의 처지에서 검찰의 대응은 괜찮을 것이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변호인 그들이 교만하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주어진 시스템에 따른 검찰 그들의 합리적인 판단을 존중한다는 뜻은 패소해도 괜찮다는 말과 동치 관계를 이루지 아니한다. 어떤 것은 괜찮다. 어떤 것은 괜찮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가 닥치면 전혀 괜찮지 않을 것을 가지고 괜찮다며 선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사 인사를 받기에 아직 이르다는 말에는 틀림이 없다고 판단한 까닭도 여기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부정과 그 뒤로 이어지는, ‘절 믿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히구루마 히로미에겐 충분했으니 이는 피고인이 감사함을 느끼는 동기가 재판의 결과가 아닌 피고인의 주장을 변호인이 신뢰해 주었다는 사실에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구루마 히로미가 피고인에 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이상 감사 받을 자격을 박탈당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마땅했다. 마땅했으나.
그렇게나 괜찮은 상황이 히구루마 히로미에게 주어지는 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아니. 오늘‘도’ 아니었다. 히구루마 히로미는 믿음에 새로운 증거를 요구치 않았으니 항소심에서도 피고인을 향한 그의 신뢰엔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피고인에게서 ‘이 패소는 당신의 탓이다’라는 터무니없는 사실을 인정하길 강요받는다. 그럴 리 없는데도. 이 재판은 처음부터 유죄로 정해져 있던 재판이었다. 그는 그것이 괜찮지 않은 줄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최선을 다했는데. 최선을 다해서 경멸받는 기분이란 어떻지?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는데도.
눈을 뜨고 있는 이상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각오한 주제에 엄살을 부린다는 자기 판단은 제법 엄정하다. ‘거짓말쟁이.’ 세간이 그를 평가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갖 것들에 눈 감은 사람들과 법 아래의 평등을 위해 눈을 가렸다는 정의의 여신 사이에서 혼자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자다, 라고. 야유한다. ‘거짓말쟁이’, 라고. 눈 먼 자 가운데서 혼자 눈 뜬 자 되어 봤자 혼자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될 뿐이니 ‘거짓말쟁이.’ 그에서 히구루마 히로미는 도통 벗어나지 못한다. 어째서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저 자신만큼은 눈을 뜨고 있고 싶어요.’ 이제는 거짓말이 된 어느 지난날의 단상에서. 거짓말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단상의.
끝에서, 거짓말쟁이의 뇌가 개화하는 과정에서 시각화된 백일몽이 시작된다. 남자는 여신의 눈을 가린 천을 붙잡고 감히 그를 끌러 내린다. 눈꺼풀을 붙잡아 올리면 드러나는 것은 동공 없는 흰자뿐이고, 여신이여. 당신의 눈은 온전한가? 눈앞을 날아다니는 투명한 벌레들은 혼탁한 유리체가 원인인 비문증이 빚어낸 착시이리다. 내 눈? 내 눈은 이제 모르겠는데. 모르겠으니.
꿰매버렸다. 백일몽 속 자신의 눈은 다시 눈꺼풀을 뜰 수 없도록 꿰매버리고 꿈이 끝나자 히구루마 히로미는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뜬다. 아, 눈을 뜬 자 정녕 누구인가. 히구루마 히로미인가. 히구루마 히로미였던 자인가. 새로이 히구루마 히로미가 된 자인가. 누구인가. 등 뒤에 서서 두 눈을 꿰매고 귀도 없이 오로지 말하기 위한 입만 가진 죽은 자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 오늘.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