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 살아가는 우리들 [SAMPLE]
- gwachaeso
- 3월 20일
- 33분 분량
<WT>
재록본
꼬리 자르기
이코마 선공
기술에도 역사가 있다. 특히나 서로 경쟁하는 이들의 손에 기술이 쥐어졌을 때 기술의 역사는 ‘꼬리잡기’라는 놀이로 그 발단과 발전 단계가 비유될 수 있었다. 따라잡히면 다시 따라잡기 위해서, 꼬리를 물려 뒤처지면 다시 앞서가는 꼬리를 물기 위해서, 발전하는 기술의 양태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역사를 알아야 했고 그 동력을 알아야 했다. 무엇이 그 기술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첨예하게 발전시키며 기술에 잠재된 능력이든 사용자에게 잠재된 능력이든 한계치까지 끌어내 발휘할 수 있게, 발휘할 수 있도록 다듬는지. 실은 단순히 상대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호승심이 단초이고 전부일지라도 역사를 아는 것은 기술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중요했기에 보더의 대원이면 대부분 자신이 쓰는 기술의 역사만큼은 공부하는 편이었다. 기술이 곧 그 팀의 ‘스타일’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에 한몫하기도 했다.
어태커 중 호월 사용자가 사용하는 옵션 트리거 ‘선공’, 일명 ‘선공 호월’은 약 15 m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옵션 트리거로, 근거리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호월 사용자가 원거리까지 참격을 날릴 수 있도록 해주는 공격 기술이었다. 근거리 ‘딜러’가 원거리까지 ‘딜’을 넣을 수 있도록 하는 유용한 기술이기에 난도가 제법 되는 이 기술을 보다 더 잘 활용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도 ‘한때는’ 활발히 이루어졌었다. 이는 호월 사용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건너는 선공 호월의 사정거리 바로 밖에서 공격하는 방식을 고안하여 선공에 대처했는데, 그 대처에 다시 대처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 한때는 호월을 사용하는 어태커들에게서 입만 열면 야유가 나올 만큼 악명이 높았더랬다. 앞서 기술의 발전은 꼬리잡기처럼 따라잡히면 다시 따라잡기 위해 발전한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포화 상태에 이르러 멈추는 것 또한 피할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선공 호월도 ‘사정거리인 20m 밖에서 건너 또는 슈터가 공격하여 제압한다’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정석과도 같은 공략법이 어태커들 사이에 굳어지고 이를 파훼할 방법이 딱히 없어 발전이 멈춘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선공 호월의 발전이 멈춘 것이 적어도 그때는 아니었고, 선공이 다른 기술로 가로막혔기 때문도 아니었다. 포화에 이른 줄 안 선공 호월을 다시 발전시키며 꼬리잡기 놀이의 꼬리를 기어코 잘라내는 데 성공한 이가 이후 나타났으니, 이, 선공이란 옵션 트리거는 기동시간이 짧을수록 사정거리가 길어진다고 했다.
그럼 이 기동시간을 극도로 짧게 줄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왔네요! 이코마 선공!]
“어라? 뭐야, 멀쩡하잖아?”
이코마 타츠히토, 19세. 보더 제일의 선공 사용자가 등장한 이후 선공 호월은 정체되어 그 자리에 멈춰져 있었다. 아무도 그보다 빠를 수 없었고, 아무도 그보다 완벽하게 맞출 수 없었기에.
초속 200m로 잘려 나가는 꼬리를 누가 잡겠는가?
Side Effect
진 유이치의
그들은 그것에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지도 않았다.
영어로 일컬으면 인상이 조금 흐려지긴 하나, 사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없어 불평하기도 뭣했다. 부작용이 그럼 부작용이지 달리 무어겠는가.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딱히 없었다. 부작용은 부작용일 뿐이고, 신체 평가 기타란에는 신체에 내재한 트리온 양이 그렇지 않은 이보다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많다’도 아니고, ‘많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문장이 한 줄 더 더해질 뿐이다. 100% 단정하지 않는 이유는 언제든 예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로선 아무래도 좋은 기술(記述)이다. 아닐지라도 그들이 신경 쓸 곳은 그와 다른 곳에 있다.
사이드 이펙트, 부작용의 ‘부’는 해당 작용이 부수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런 것치고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꽤 부수적이지 못한 편이었다. 행적이 이를 증명하는 진은 말할 것도 없었고, 키쿠치하라 역시 다소 비뚜름한 감이 있는 성격을 형성하는 데 사이드 이펙트의 ‘이펙트’가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곁다리로 존재한다고 하기엔 인생에 미치는 존재감이 너무 크지 않나? 투덜거릴 수야 있지만, 투덜거려봤자 변하는 인생도, 의미도 없다는 게 사실이기는 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동에 꼭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무슨 행동을 할 수 있겠나. 모든 행위가, 목적에서 벗어나는 한 모조리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리는데. 사이드에 불과해지고 마는데.
반대로, 모든 행동이 의도한 바와 상관없이 의미를 가지면 어떻게 될까.
감히 생각건대 이만한 불행도 따로 없을 듯했다. 나비 날갯짓에선 눈을 돌려도 그가 부르는 태풍에서는 눈 돌리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정된 미래도 아니었다(그게 문제였다). 최초로 나비의 날개를 붙잡은 어린 시절에, 소년은 앞으로 수천의 나비를 잡을 자신도 함께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것은 확정된 미래였다. 지금은 손가락 끝에 묻어날 뿐인 하얀 인분이 손을 덮고 팔을 덮고 결국엔 눈앞까지 덮어버리는 미래가 지금은 그저 손가락 끝에만 묻어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나비효과도 아니고, 부가효과도, 부작용도 아니었으니 단지 이렇게 고쳐 쓸 수는 있었다.
Side Effect
Main Event
나비 꿈
타마고님 팬아트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춤추다 인간으로 깨어난 장자는 자신이 과연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자신이 바로 나비가 꾸는 꿈인 것인지 어느 것이 사실인지 모르겠다는 설화를 남겼다. 꿈을 꾼다면 그런 꿈을 꾸어야 후세에 남길 이야기가 생길진대 나비의 꿈을 꾸는 그는 여전히 인간이었고, 그 대신 나비가 된 꿈속의 나비들은 그의 머리 위에서 팔랑팔랑 춤추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과연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누군가가 꾸고 있는 꿈속의 누군가인지 진은 알지 못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꿈은 다른 이와 공유되기도 하는 것인지 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진에게도 예외 없는 사실이다.
진은 지금까지 나비에 관해 좋고 싫음을 주변인에게 말한 적이 아직 없었다. 다만 비유적 상징으로서 나비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나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연상하는 효과. 이를테면 바다 너머 땅의 태풍 같은 것을 연상하는 효과. 그것은 비늘에 묻어나는 인분 가루에 취해 보는 환상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들을 보지 못했다면 손가락에 인분이 묻어날 까닭도 없었으니, 선후관계를 따지면 언제나 그의 손 안에 나비가 붙잡히는 것이 연상의 다음이었다. 그리하여 깍지 낀 손가락으로 만든 그물에 나비 한 마리를 가둔 그는 수천 번째의 언젠가처럼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이’ 나비는 ‘안 돼.’ 그리고는, 작게 팡, 소리를 내며 어떤 가능성을 손바닥 안에 가둔 채 접어버린다. 손을 털어낼 때까지 안쪽은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스스로 정한 규칙이다. 보아서 좋을 게 하나 없으니. 보아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최선을 선택하는 버릇은 언제부터 몸에 배어들었나. 최선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만 하는 눈은 그 기준을 무엇에 두고 세상을 가늠하고 있는가. 세상은……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그의 꿈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수많은 나비가 날아다니고 때때론 제게 다가붙어 그 날개를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강제하는 그런 꿈. 그럼에도 그는 한가로이 들에 누운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꿈속이므로 그에겐 일어나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나비들이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은 들에 퍼져 있는 그 들 위에 누워 진은 한가로이 잠을 청한다. 꿈속에서.
사이드 이펙트는 가끔 소유자에게 이를 감당할 정신력도 함께 선사하는 게 아닌가 같은 의심이 들 때가 간혹 있다. 진실은 알 수 없다.
Hound
랭크전 8라운드 니노미야전
판 전체를 속이는 도박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 그대로 허공으로 뻗어 나가 흩어지는 듯했던 사냥개가 몸을 틀어 자신의 앞으로 돌진한 순간 니노미야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정면에서 사선으로 쏟아지듯 내리꽂힌 하운드는 니노미야의 트리온체를 너절하게 찢어발기고 바닥까지 일부 부순 뒤에야 힘을 잃었고, 추스릴 틈도 없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가속까지 더해 트리온체의 심장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스콜피온에 결국 트리온체가 한계를 선언했다.
베일 아웃은 보더 대원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핵심 기술이었다. 트리온체가 한계를 맞이하면 그 즉시 육체를 본부의 지정된 구역으로 긴급 탈출시켰고, 자의로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긴 하나 전투 중에 베일 아웃을 하는 경우는 보통 트리온체가 유지되지 못할 만큼 파괴되어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였다. 설령 현장에 계속 남아있고 싶다고 해도 보호 장비 하나, 강화된 신체 능력 하나 없이 맨몸으로 전투 현장에 놓인 뒤 일어날 일은 사이드 이펙트 같은 게 없어도 예상하기 어렵지 않기에 어불성설이었다. 본부로 돌아간 뒤 오퍼레이터와 함께 남은 대원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매뉴얼이고, 상식이었다. 거기에 본인의 의지가 끼어들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의지의 방향이 행할 곳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정답으로. 가장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곳으로. 그에 끼워맞추지 못하는 의지엔 의미가 없었다. 정확히는 그 의미를 잃고야 말았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이는 달라지지 않는 상식이었다.
상식…….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태연히 저질러 놓고 돌아오지 않는 이가 있었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말하지 않은 것인지 이유조차 모르게 돌아오지 않는 이가 있었다.
트리온체의 통각은 본인이 파손 사실을 알 수 있게끔 미미한 정도로 설정되는 것이 기본이었다. 딱 그 정도로 둔중한 통증으로 덮이는 육신이었다. 언젠가와 같이.
-
hound
1. 사냥개 2. 따라다니며 괴롭히다
내상
아프토크라톨전 카자마 부대 이야기
너무나 쉽게 잘려 나가는 팔다리에 헛구역질을 한 훈련생도 한둘은 있을 법하다. 트리온체에 설정된 통각이야 미미하지만, 눈을 통해 곧장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지나치게 자극적이라 생각보다 많은 훈련생 ‘지망생’이 이 과정에서 탈락하고는 했다. 시험을 경험한 것 자체가 트라우마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보더 훈련생은 해당 과정을 수료하고 통과하여 ‘C’라는 알파벳을 달 자격을 얻은 이들이다. 따라서 이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더는 없다. 그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논제이기 때문이다.
본부 소속 A급 3위 부대 카자마 부대는 일전에 아프토크라톨이 미카도시를 침공했을 때 블랙 트리거를 가진 에네도라와 조우하여 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 바 있었다. 에네도라가 가진 블랙 트리거는 트리온의 물성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특징을 가진 ‘볼보로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트리온을 기체로 변화시킨 뒤 이를 흡입한 트리온체에 내상을 입히는 공격을 펼칠 수 있었고, 그 원리가 밝혀지기 전 카자마 부대의 대장 카자마 소야는 해당 기술에 당해 베일 아웃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오퍼레이터와 합류한 그의 지시에 따라 남은 부대원들은 전투에서 퇴각했다. 신속한 지시 덕분에 그의 부대에서는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트리온체의 손상은 보통 외상이기에 ‘내상’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내상이라 할지라도 본래 육신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카자마 소야가 실제로 입은 부상은 없으며 우타가와와 키쿠치하라 역시 이를 인지한 채 현장에서 퇴각했다. 이후 이어진 본부에서의 전투에서는 카멜레온을 사용한 기습 공격으로 적의 숨통을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끊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으로 된 것일까?
잘려 나가는 팔다리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그 익숙함을 조롱하듯 찾아온 내상은 트리온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눈을 통해 곧장 들어오는 시각 정보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일반인의 대여섯 배로 강화된 청각으로 수집한 정보는 쉬이 무시할 것이 되지 못한다. 아직. 분류가 필요한, 생경한 소리가 전달되고 이내 공유되니, ‘수고했다’라는 말로는 달래지지 못하는, 온전하게 온존된 육신을 확인한 후에야 드는 안도감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면 대장은 역시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상이든 외상이든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베일 아웃
The Two Halves
베일 아웃은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트리온체가 행동 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 본부로 자동 귀환하도록 하는 이 기술은 보더 전투원의 생존율을 크게 끌어올렸고, 동시에 돌이킬 수 없이 처박는 모순적인 부작용을 낳았다. 더는 ‘생존’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 그들은 사실상 목숨이 2개라는 점을 이용하여 ‘목숨(트리온체)’을 내버리는 무모하고 대범한 전술을 세우고 또 실행했다. 덕분에 승률은 상승했지만, 베일 아웃이 개발된 이래 함께 상승한 승률과 생존율은 그들이 ‘적에게서 생존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기에’ 올라간 승률도, 생존율도 아니었다. 그들은 적과 함께 죽어버릴 각오로 적에게 덤벼들지만, 자신이 진짜로 ‘죽어버리진’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모순적인 각오 속에서 그들은 ‘이웃’의 침공을 연달아 막아낼 정도로 강해졌다. 이는 모두 본부가 건재하여 베일 아웃 기능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승전이었다(그럼에도 본부에 직접적으로 가해진 적의 급습으로 오퍼레이터 쪽에선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베일 아웃 기능을 사용할 수 없던 C급 대원 쪽에서도 다수의 실종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 상태에서 베일 아웃이 사라진다면 그들의 강함은 어떻게 될까. 여전히, 강할까? 무모한 전술을 그대로 실행하여 ‘목숨’과 승리를 맞바꿀까?
보더 본부도 이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관해 기본적으로 베일 아웃 기능이 배제된 훈련용 트리거를 받는 C급은 전장에서 재빨리 대피하는 훈련을 필수적으로 수료해야만 했고, 기지 밖에서 트리거를 사용하는 일, 다시 말해 전투에 임하는 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베일 아웃이 가능해지고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B급부터는 ‘베일 아웃이 불가능한 상황’을 함께 상정하여 전술을 짜는 것이 필수적인 소양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굳어져 버린 기본 전투태세가 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목숨이 2개인 양 전투에 임했고 ‘파괴’되었다. 베일 아웃은 혁신적이지만 이면의 그림자 또한 몹시 짙은 기술이 되었다. 사실 전투원들의 목숨을 2개로 만든 기술은 트리온체 생성이지 베일 아웃이 아니었지만, 긴급 탈출 기능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트리온체가 파괴되는 즉시 그 상태로 무방비하게, 비전투원이 되어 현장에 남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회피했을 그들이기에 베일 아웃이 애꿎게 오명을 뒤집어썼다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특히 ‘두 동강’ 같은 일이 벌어진 다음엔 더욱 그랬다.
깊이 숙고해야 할 때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뒤엔 늦을 것이기에.
Captain
원정 시험 스와 코타로 이야기
원정 선발 시험 7번대 대장으로 선출된 스와 코타로는 제비뽑기 운과 감에 따라 대원들을 선발하였으며, 그중 제비뽑기 ‘운’에 대해서는 온전히 자신의 ‘운’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트리온으로 특별 제작된 제비는 사전 앙케트를 반영하기 위해 준비되었을 것이므로, 이는 마작에서 ‘동(東)’을 가리기 위해 굴리는 두 번의 주사위가 실은 조작되어 있었다는 말과 의미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그랬다.
물론 그 뒤에 진행된 대원 선발에는 각 임시 대장의 의향이 분명히 반영되었으며, 스와 또한 자신의 감을 그 기준으로 삼아 오퍼레이터를 제외한 대원들을 선발하였음을 밝혔다. 어차피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 그러한 기준을 세운 이유였다. ‘어차피’ 최종 선발과 대원 구성은 그들의 권한이 아니다. 그들의 의향은 또다시 ‘앙케트’ 선에서 정리될 것이다. 다음 세대의 대장 후보 또는 미래의 간부 후보로 각 팀의 임시 대장이 선출되었다고 생각하는 그의 이러한 생각은 대원 선발에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향을 주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자신도 부정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마찬가지로, ‘원래 대장 그룹’에 속하는 스와 부대의 대장, 곧 자신 또한 간부 후보로 고려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때마침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 또는 덕분이었다. 변화한 상황 덕에 스와가 자신을 언급하지 않은 의미가 따로 있는지는 결국 화제로 오르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고, 지나간 화제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다고 하여도 그 방향이 스와를 향하지는 아니할 듯하였다.
미쿠모의 노트북이 트리온 부족으로 켜지지 않는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섣불리 그를 책망하지 않은 스와는 다만 이렇게 그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할 거냐? 미쿠모.’ 이는 ‘원래 대장’인 그가 자기 대원을 대할 때의 태도로, 발언권을 미쿠모에게 부여함으로써 미쿠모가 상황을 직접 수습할 기회를 내준 그는 이전부터 ‘지휘’와 ‘예비’ 두 가지 면에서 자질을 드러냈으며 일부 A급 대원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을 시험 중에 그의 장점으로 평가한 이가 앞서 사전 앙케트에서 스와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꼽았던 카자마 소야라는 점은 조금 재미있다. 스와는 카자마를 성격이 나쁘다고 평했고, 마작을 이유로 뽑은 아즈마와 후유시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선정할 때 내세운 기준 역시 성격이었다. 그러는 본인은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몰랐다. ‘나쁘지는 않지 않냐?’
앞서 큰 의미 없이 감으로 대원을 뽑았다고 말한 그였지만 그것이 그가 대원을 신경 쓰지 않거나 가볍게 여긴다는 의미로는 해석될 수 없었다. 미쿠모가 자신의 평가를 깎아내릴 때 이를 중단시키고,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을 땐 자신에게 넘기라고 말하는 그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명백하고도 마땅하게 자신의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익숙하게, 그리고 노련하게. 그래서일까 그의 지시에 카토리처럼 불만을 터뜨릴 수는 있어도 불응은 없었다. 그에겐 언제나 ‘스와 부대’를 능숙히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원래 대장’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이.
단언컨대 각 팀의 임시 대장이 미래의 간부 후보를 재기 위해 선발된 것이라면 그중에서 그가 제외되는 경우의 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원래 대장’이란 그런 것이다.
마지막 1점은 득점 3배
거짓말쟁이는 나 혼자면 돼
베일 아웃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베일 아웃의 기준점은 원정선이었고, 트리온체의 이동 능력을 고려했을 때 반경 3 km는 그다지 넓은 범위라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정선을 매시간 전투원들의 위치에 맞춰 이동시킬 수도 없는 노릇. 베일 아웃의 유용성과 실전성은 몹시 뛰어나나 그렇다고 맹신해도 좋은 기술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애당초 맹신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맹신 곧 과신은 과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트리온체가 파괴당하고 머리부터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지는 순간 죽음을 직감한 것은 당연했다. 무리에서 멀어져 고립된 상황이었기에 귀환 역시 무리였다. 그 가운데 꾸게 된 꿈은 솔직히 말해 썩 유쾌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인지―아마 꿈이라서 그러했을 것이다―알고 있는 방향을 부대원들에게 일러주고 그 길을 따라 동행할 수도 있었다. 무사하셨네요, 미즈카미 선배! 아, 응. 대답하면서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꿈인데도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원정선이 시선 끄트머리에 걸린 순간 꿈마저 끝났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체스로 치면 킹을 쓰러뜨릴 차례였고, 마작으로 치면 유국을 선언할 때였다. 장기에서는……. 일평생, 그리 길지도 않은 일생이지만 그중에서도 한때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던 장기에선 어떻게 했더라. 꿈인 게 맞는 것 같았다. 이코마 부대 작전실의 장기판은 사용될 때보다 그저 자리를 차지하며 놀릴 때가 더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조차 기억하지 못하다니. 기억나지 않는다니. 다만 머리를 숙이고 이처럼 말한다면 예를 크게 어기는 것은 아닐 것 같았다. 졌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했다. 불복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복기일 텐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거르지 않도록 배우고 익히고 훈련했다만, 남은 시간 안에 해낼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즈카미는 흔들리는 등 위에서 반쯤 뜬 눈으로 그리 생각했다. 눈썹까지 내려와 굳은 핏덩어리 때문에 시야가 방해받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손을 들어 그걸 닦아낼 정도의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아 별수가 없었다. 이코 씨. 다만 부르며 시선을 돌릴 수는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선에서 눈만 굴려 시선을 옮기자면 자신을 둘러멘 이의 반대쪽 팔이 보이지가 않았다. 각도 탓이 아니라 분명히. 그러나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 저처럼 피가 아니라 트리온인 것이 다행이었다. 정말로. 어떻게 드신 거예요? 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팔 하나가 없으니 업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트리온체는 일회용이라 복구 기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는 베일 아웃처럼 복구 기능이 추가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단지 눈을 감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눈을 감는다고 복기 중에 잠드는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두 번째 꿈은 아무래도 사양이기에.
저격이 오지 않는다는 건
METACOGNITION
집을 베도 된다는 뜻이지 않냐고, 이코마 타츠히토 외 다른 사람이 그리 말한다면 그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야유를 들었겠지만, 이코마에게는 ‘할 수 있는’ 행동이었기에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말이 되었다. 엄폐물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면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을 내버려둘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집을 벨 줄 알고, 집을 벨 각오로 선공의 사정거리를 늘린 것은 아니었다. 하다 보니 ‘어? 되네?’의 느낌으로 성공한 것이지. 그렇지만 된다는 걸 알고 나니 시도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 이코마는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가 처음으로 주택단지를 선공 호월 하나로 쓸어버린 날, 멀찍이서 바라보던 누군가는 말했다. 메테오라라도 쏜 줄 알았어. 지형이 삽시간에 붕괴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만한 빛이 눈에 띄진 않았을 테지만. 그 모든 섬광은 찰나에 응축되어 있었다. 가공할 만큼 가는 참격이 가능한 한 멀리 뻗어나갈 때 기존의 곱절로 늘어난 비거리 끝에는 열아홉 살,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선 자의 시선이 오롯하게 걸렸다. 그리고는 정면을 향했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벌어진 틈새까지 시선이 닿은 것은.
거기 뭐가 있어요?
틀이 있어.
뭐가 있다고요?
처음부터 볼 줄 알고 시선을 거기 둔 것은 아니었다. 하다 보니 ‘어? 있네?’라는 느낌으로 알게 된 것이지.
틀…… 렸네. 이거 안 베어진다.
뭘 베려고 한 건데요?
틀.
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어도 이코마 타츠히토 외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말’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이야, 저격이 안 온다는 건 집을 베도 된다는 뜻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말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지. 상관없다는 걸 알고 나면 보지 않을 이유도 없어서,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온 김에 함께 물었다. 로그에서 이코마 씨는 항상 카메라를 보고 계시던데. 이유가 있는지 묻는 미쿠모 오사무에게 대답하는 이코마의 시선이 미쿠모 오사무를 향하는 동시에 정면에 걸린다. 정면에, 프레임에, 사각 틀에, 카메라는 아니지. 카메라가 아니면요? 프레임. 아니. 프레임도 아니지. 지금은.
활자에. 활자에 시선이 걸린다.
묵음
블랙 트리거 괴담
그런 소문이 돌았다. 블랙 트리거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염원처럼 강하게 깃들어 혼자서 소리를 낼 때가 있다고. 숫제 귀신 들린 물건 취급이었으나 원체 이 트리온이란 게 한계가 없다시피 할 만큼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물질인지라 불가능하지도 않으리란 추측이 소문 뒤에 따라붙었다. 그들은 이미 트리온을 통해 의지를 전달하거나 목소리에 실어 소통하고 있었다. 신체를 원본보다 강화하여 생성하는 것도 가능한 기술로 발전시키기도 했으니, 음성을 녹음하여 재생하는 것쯤이야 기술부에서 마음잡고 시도한다면 안 될 것도 없어 보였다. 이쯤 되면 화제에서는 조금 벗어난 논제가 되었다곤 할 수 있었다. 연령대가 어린 이들이 많은 보더 대원 사이에서는 ‘그래서 블랙 트리거에서 정말로 소리가 나느냐’가 화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는 여름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오싹한 괴담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몰랐다. 보더에는 블랙 트리거 사용자가 공식적으로 두 명 존재했고, 그중 한 명인 진 유이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간 C급 훈련생이 한 명 생길 만큼, 그에게 힘을 불어넣을 만큼 소문은 힘을 얻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진 씨……! 아, 응. 안녕? 바쁘지 않거나 실례가 아니라면 질문 하나만 받아줄 수 있냐고 묻는 그는 진과 초면이었기에(정말?) 제법 긴장을 한 상태로 최근 C급 훈련생들 사이로 도는 소문의 진위에 관해 질문했다. 사실 굉장히 실례일 수 있는 질문이기는 했다. 트리온의 가능성이 어떻든 간에 귀신 들린 물건 취급이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진은 용기를 낸 훈련생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특별히 더 신경 쓴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조금도 인상을 찡그리거나 하지 않고 도리어 가볍게, 평소처럼 웃었다.
대답은 ‘아니’였다.
“요즘 보더에서 도는 소문 때문이지? 나도 궁금해져서 한 번 밤새 귀에 댄 채로 잠들어 보았는데 아쉽게도 그냥 푹 자버려서 말이야.”
물론 그 말의 진위 또한 훈련생에게는 알 길이 없었다. 대답이 되었을까? 아, 네……!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 씨……! 이제 이 훈련생은 자신이 알게 된 이 사실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퍼뜨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상상에서 시작되어 괴담으로 변한 이 괴소문도 서서히, 진상이 밝혀진 괴이가 다 그렇듯 흐지부지되어 사라질 것이다. 진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밤. 우연하게도 본부 등지 편의점에서 만난 어태커 상위 세 사람은 각각 캔 맥주와 캔 커피와 콜라 캔을 한 캔씩 따며 대화를 나누다 그때의 소문을 화제로 올렸다. 한풀 꺾인 괴담에는 관심이 없는 세 사람이었지만, 트리온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었다. 목소리를 실어 전달도 할 수 있고, 신체도 압축하여 보관할 수 있으니 트리거 안에 목소리를 남겨두는 것 또한 불가능하진 않으리란 결론에 이들의 의견이 모였다. 그러나 결론의 마지막에, 진이 우스갯소리처럼 덧붙인 어떤 말이 조금, 남은 이들의 신경을 거스르고 말았다. 결론은 하면 될 것 같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만약에……. 다른 사람도 아닌 ‘진 유이치’가 만약을 입에 올렸다.
“내가 블랙 트리거가 되면 한 번 시도해 볼게, 확인해 줘.”
그 말에 카자마는 그걸 농담이라고 말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싸늘한 시선을 그에게 내던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으며, 타치카와는 그에 합류하면서도 딱 한 문장을 소리 내어 입에 올렸는데, 그것도 네 사이드 이펙트냐? 다만 진은 훈련생 앞에서 그랬던 것 같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되물었다. 어떨 것 같아?
-
만약의 세상이 펼쳐진, 그래서 진이 보았는지 알 수 없는 어느 미래에, 한 손에 호월을 들고 다른 한 손에 검은 트리거를 든 타치카와가 있어 아무도 그 곁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아무도 그 곁에 없는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소리를 입고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타치카와의 목소리였다. 다른 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이의 목소리는 될 수 없었다. 들릴 수 없었다.
너 그거 사이드 이펙트로 본 거 아니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안 내는 거냐, 못 내는 거냐?
목소리도.
묵음 2
침묵
단순히 유품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실질적인 유지가 깃든 그것은 곧 그 자신이라 불러도 상관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러기엔 그것과 더는 ‘소통’할 수 없었다. 소통의 단절은 죽음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 어떤 변환도, 변화도 죽음을 극복하여 그것을 없던 것으론 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자체가 죽음을 가공한 것이기에, 생전의 유지대로 그 뜻을 따라 모형을, 형태를 조형한 사후의 유해일 뿐이었다. 블랙 트리거는 또 다른 죽음의 형태였다. 죽음의 증거였다. 그리하여 모래처럼 부서지는 육신에는 더는 죽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생도 없었다. 그러니 모래처럼, 무기물이 되어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생은 다 빠져나가 물기 하나 없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바닥까지 긁어모아 트리거에 쏟아부은 생과 사가. 그러니 그 안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 지나치게 가벼워서 사람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모였지만 말 그대로 모든 것이기에, 빛뿐만이 모인 것이 아니기에 그것에겐 희어질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검어졌다. 그래서 그것은 블랙 트리거라고 불렸다.
뛰어난 트리온 능력자일수록 블랙 트리거를 생성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그런 능력자는 사이드 이펙트를 가질 가능성도 크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사이드 이펙트를 가진 보더 전투원이라면 자신의 마지막 순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능력을 한 번쯤 생각하는 것이 드물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블랙 트리거를 만든다면 어떤 트리거를 남기게 될까? 그보다, 블랙 트리거를 남기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까? 블랙 트리거를 만들면 유해 수습도 불가해진다고 하는데.
과연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A급 3위, 카자마 부대의 어태커 키쿠치하라 시로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자신을 연상할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블랙 트리거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이란 평을 받고 원정대로 선발되기도 한 유능한 인재였다. 원정대로 선발된 그는, 솔직히 말해 그 나이대의 소년에게는 적절치 못할 만큼 죽음과 과하게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였으며 그 자신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블랙 트리거를 고려할 만큼 위기를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어 다행이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춘 부대이기도 하거니와, 원정대는 블랙 트리거에도 대항할 실력을 갖춘 이들을 원정대로 뽑았지, 블랙 트리거로 만들 요량으로 이들을 선발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선발 시험은 매 분기 철저하게 준비되어 시행되었다. 어느 해인가에도 키쿠치하라는 선발 시험을 통과해 원정대로 발탁되었고, 원정선에 올랐다.
그들이 탑승한 원정선이 미카도시로 귀환하였을 때, 원정선에서 내리는 키쿠치하라의 손에는 떠날 적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검은 트리거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넣은 뒤 단 한 순간도 손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먼지투성이. 흙투성이. 평소라면 질색할 위생 상태인 채로 하선한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다음과 같았다.
들리지 않아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어느 해 어느 여름인가에 돌았던 소문이 있었다.
믿은 적은 없었다. 한 번도.
그래서일까.
키쿠치하라 시로의 사이드 이펙트는 강화 청각이다. 그가 듣지 못하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한다.
묵음 3
'성격이 나쁨'
A급 3위, 카자마 부대의 부대장 카자마 소야의 형 카자마 신은 오 년여 전 일어난 전투에서 사망했다. ‘구 보더’ 소속 열아홉 명 중 사망한 열 명 중 하나였다는 뜻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발생한 사망자 중에는 블랙 트리거를 남기고 사망한 자도 몇 있었으나 카자마 신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유해는 모래로 변해 흩어지지 않았고, 유가족은 빈 관으로 장례를 치를 걱정을 덜었다. 그에 다행이니 뭐니 입에 올리는 것은 적절치 못하리다. 아무도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내어놓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오 년여 전 그들―보더 관계자가 가진 정보는 현저히 적었으나 그럼에도 블랙 트리거의 의미와 그것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유가족을 만나 어떻게 시신조차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소명했는지는 카자마 소야에게 알 바가 아닌 사실이었다. 사망자에게 모두 유가족이 있는지도 불명이었으니. 다만 사실을 밝히자면 블랙 트리거에 관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블랙 트리거의 소유권을 유가족이 요구하면 어찌할 셈이었는지도. 모두 카자마 소야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으나 그 해 벌어진 전투에서 만들어진 블랙 트리거는 보더 본부의 소유로 들어갔다고, 후일 보더에 속하게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보더 본부가 최초로 획득한 블랙 트리거였다. 그전까지 구 보더 소속의 대원들은 일반 트리거만 사용해 왔으며 카자마 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블랙 트리거가 아니더라도, 트리거를 사용하지 않을 자에게 내어줌으로써 자원을 낭비할 만큼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 카자마 소야가 카자마 신을 가르친 보더의 일원이며 후일 지부장 자리에 오르는 린도 타쿠미와 유가족과 유가족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로 대면하여 대담을 나누는 일이 일어난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카자마 소야가 카자마 신의 트리거를, 트리거 홀더라도 유품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관계자가 침묵을 지킨 끝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물어보는 이도, 캐내는 이도 없었다. ‘구 보더’는 아는 자들만 아는 역사로 서서히 잊힌다.
보더 본부에 블랙 트리거에 관한 소문이 돌았을 때, 단순 음성 녹음이라면 일반 트리거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같은 가능성을 타진한 이들이 있었다. 꼭 블랙 트리거여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원들에게 공개되지 않았을 뿐 기술 개발은 이미 어느 정도 진척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카자마 소야는 진 유이치의 말에 타치카와 케이 만큼도 반응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판기에서 뽑아낸 캔 커피를 마셨다. 블랙 트리거와 관련하여 돌던 소문은 그해 여름과 함께 사그라들어 자취를 감췄다. 여름이 태우고 남은 자리를 가을의 사늘한 손길이 바람과 함께 훑었다. 카자마 소야는 그 앞의 진 유이치가 한때 소유했던, 모가미 소이치가 제작한 블랙 트리거 풍인의 적합자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카자마 신이 블랙 트리거를 남겼다면 자신은 그것의 적합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오래 전 단 한 번 떠올리고 만 블랙 트리거 쟁탈전 중의 상념을 카자마 소야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
트리온 능력이 높은 사람은 사이드 이펙트 소유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사이드 이펙트를 가질 만큼 트리온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블랙 트리거 제작에도 성공할 가능성도 컸다. 그러니 결국 이러나저러나 가능성의 문제, 확률의 문제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카자마 소야는, 그 확률이 자신에게도 시도할 만큼은 된다고 판단했다. 베일 아웃이 불가능한 상황. 그 가운데 파괴되어 해제된 트리온 전투체. 그리고 다들 아직,
“싫어요.”
갈 길이 멀었으므로.
갈 길도, 나아갈 날도 아직 멀었다. 카자마 소야의 트리온 능력은 보더 전투원 평균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20대에 들어섰으니,
“하지 마세요.”
더 성장할 일은 아쉽게도 요원했다. 아, 카자마 소야는…… 그와 친한 B급 건너 스와 코타로가 평한 만큼은 아니어도 스스로 성격이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아무래도…… 그러나 거짓은 아닐지도 몰랐다.
“난 절대 안 쓸 거니까. 해봤자 무용지물로 썩힐 거예요. 그러니.”
“그럼 우타가와. 부탁한다.”
“그러니ㄲ
ㅏ
*
아, 마지막으로 남길 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부탁한다고 했으니 해내리란 믿음은 있었다.
키쿠치하라를 부탁한 것도.
카자마 소야는 그만한 안목을 가진 대장이었으므로.
묵음 4
유언
블랙 트리거에서 소리가 난다는 괴담이 쿠가 유마에게 닿았을 때 쿠가는 진 유이치가 준 쌀과자를 입에 우물거리고 있었다. 또한, ‘설마 싶지만 설마 그게 사실이냐’라는 질문에 입속의 과자를 꿀꺽 삼켜 목구멍 뒤로 넘긴 뒤 대답하는 그에게서도 ‘지금 감히 블랙 트리거를 우롱하는 것이냐’ 같은 태도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블랙 트리거 소유자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그들은 으레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럴 리가.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걸? 그 사람이라면.’ 어쩌면 블랙 트리거 소유자는 블랙 트리거를 만들어낸 이와 전보다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되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런 사람만이 블랙 트리거의 적합자가 될 수 있는 거던가.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만, 진실은 또 알 수 없었다. 블랙 트리거에 대해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은 탓이었다. 그건 곧 트리온이란 비가시물질의 한계, 이상, 신비에 관해 묻는 셈이 되기도 했다.
일찍이 또 다른 블랙 트리거의 소유자 진 유이치는 자신이 가졌던 모가미 소이치의 블랙 트리거 소유권―독점권을 포기하면서 ‘그라면 자신의 결정을 이해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상대를 향한 깊은 이해는 사후 그가 블랙 트리거를 깊이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에서 가능해진 것일까?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그렇게 만든 블랙 트리거가 제 손에서 시동 되도록 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블랙 트리거의 최초 적합자는 보통 블랙 트리거가 제작되는 그 순간에 있기 마련이었다. 트리거란 사용되기 위한 도구이므로 사용자가 없으면 의미도 없었다. 그러니 ‘너’는 ‘나’를 사용해서 살아남아라. ‘나’를 사용하는 방법은 결국 ‘나’를 이해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나’를 향한 이해는 불가피하다. 좋든, 싫든. 달갑든, 달갑지 않든. 그리하여 진 유이치가 모가미 소이치를 이해하고 쿠가 유마가 쿠가 유고를 이해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이해의 한계는 또 어디에 있는지를 질문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디까지 이해하면 당신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언제까지.
블랙 트리거에서 소문이 난다는 괴담이 돌았을 때 그들은 생각했다. 블랙 트리거 안에 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면,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었나요? 그 안에 남기고 싶은 당신의 말은 없었나요? 이해엔 끝이 없고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실감하게 되는 것은 오래전 당신을 잃은 이후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실의다. 블랙 트리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안타깝게도. 당신을 온전히, 완전히 이해하는 것 역시 이젠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어디 산 사람이라고 그게 이해되는 것이던가. 살아있는 사람이 대상이라면 그게 쉽던가. 그러니 이것이 이렇게나 자책할 일이던가…….
유령 소리
유령 괴담
A급 3위, 카자마 부대 어태커 키쿠치하라 시로의 사이드 이펙트는 강화 청각이었다. 소리에서 재질, 중량, 상태 등 여러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그는 일상에서부터 자각 없이 능력을 사용해 왔고, 덕분에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리라면, 처음 접하는 소리가 아닌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거의 정확하게 정체를 알아낼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처음 접하는 소리일지라도 소리에서 알아낸 정보들로 그 정체를 추론해 낼 수도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이드 이펙트와 정밀한 활용 덕에 그는 제법 빠른 속도로 B급에서 A급으로 진급한 보더 대원 중 한 명이 되었다.
키쿠치하라는 그가 가진 부작용의 ‘부작용’으로 까다로운 성격으로 성장하였으나 그 성정이 결코 나쁘지마는 아니하였다. 물론 건방지고 오만하다는 평을 이 자리에서 수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건방짐과 오만함의 뒷면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총체적인 실력이 있어, 말뿐으로 그치는 거의 일어나지 않기도 하였다. 이러한 키쿠치하라의 사이드 이펙트는, 본인 입으론 수수하고 별다른 힘이 없는 능력이라고 한때 말한 것과 달리 그 자신이 갈고 닦은 정밀한 구분 능력이 함께하였을 때 월등하고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능력이 되었다. 실로 그의 까칠한 성격과 이따금 폭언에 가까울 정도로 정곡을 후벼파는 날 선 말을 견딜 수만 있다면 그에게 도움을 구하여 해답을 얻고 편안한 숙면을 누릴 수도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런 대담이 오간 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키쿠치하라……! 제발……!”
절실한 부르짖음에도 키쿠치하라의 태도는 냉담했다.
“싫다고 했어요.”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나 진짜 한숨도 못 자겠어서 그래. 응? 내가 밥이든 음료든 뭐든 살게. 딱 한 번만 확인해 줘라.”
“그냥 안 주무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제발!”
어느 날부터 보더 본부 일부 구간에서 의문의 소리를 듣는 자들의 제보가 끊이지 않기 시작했다. 정체는 알 수 없고 사람 등골은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로 인해 공포를 호소하는 보더 대원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그런 상황 속에서 키쿠치하라는 그들에게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는 존재로서 더할 나위 없었고, 대개 파이프 소리에 불과한 소리에 유령이 아니냐며 겁먹는 이들의 모습은 키쿠치하라의 눈에 더없이 한심하게 보이기만 하였다. 이런 심약함으로 어떻게 네이버에 맞서 도시를 방위하겠다는 건지. 보더의 선발 기준에 의문이 생길 때도 종종 있었으나, 앞서 말했듯 키쿠치하라는 다소 건방지고 오만하고 재수 없이 굴 때가 종종, 실은 꽤 자주 있곤 하였지만 성정이 손쓸 만큼 나쁘거나 못된 사람은 결코 아닌 사람이었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쉰 뒤 문제의 소리가 나는 지점으로 발을 옮긴 키쿠치하라는 솔직히 말해서 벽 속에 묻힌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별것 아닌 소리, 다시 말해 익숙한 소리를 들을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키쿠치하라에게 들려온 소리는…….
“모르겠더라고요.”
“네가 모른다고?”
“처음 듣는 소리이니 모를 수도 있잖아.”
부대원들이 한데 모여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키쿠치하라는 햄버거를 한입 물었고, 그사이 우타가와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치만, 소리에서 알게 되는 정보도 있잖아. 짐작 가는 것도 없었다는 거야?”
그 말이 맞았기에 키쿠치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바짓자락까지 붙잡힐 것 같은 애원을 듣다못해 따라간 장소는 본부 3층의 어느 복도 끄트머리. 타이밍 좋게 그들이 발을 내딛고 얼마 되지 않아 들려온 소리에 키쿠치하라를 제외한 이들은 으악! 비명을 질렀고, 비명에 묻히기 전 소리가 키쿠치하라의 귀에 닿았다. 물론 키쿠치하라는 비명에 묻혔어도 문제없이 소리를 구분해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아무튼, 놓치지 않고 잡아챈 소리는 그의 귀에도 생경한 소리였다는 이야기였다. 키쿠치하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소리의 특징도 이와 연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가 아는 소리의 목록에 존재하지 않고 어떤 소리와도 같지 않았으니, 이는 소리를 정밀히 구분할 줄 아는 키쿠치하라였기에 더욱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모르는 이라면 이를 바람 소리로 착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건물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때부터 공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키쿠치하라는 그 차이를 알았기에 단호히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바람 소리는 확실히 아니네요.’
‘그치!’
‘그리고 파이프 소리도.’
그렇다면…….
“진짜 유령 소리라는 거야?”
때는 여름이라 온갖 괴담이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보더 본부 안에서도 횡행할 때였다. 식사를 마친 키쿠치하라는 종이 팩 주스에 빨대를 꽂으며 무심히 말했다.
“글쎄. 관심이 없어서.”
관심도 없고, 존재도 믿지 않았다. 지난날 키쿠치하라의 ‘정보 없음’ 선언은 오늘날 본부를 가로지르는 유령 소문을 낳는 데 일조했으나 정작 그 자신은 눈곱만큼도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에 앞서 생각하지도 않았다. 실체도 없는 허상에 겁을 지레 먹는 모습은 한심하기 그지없게 다가오는 편이었다. 키쿠치하라에게는. 이윽고 그는 맞은편에서 내내 묵묵히 식사에만 집중하다 이를 마친 카자마에게 말을 걸었다.
“설마 카자마 씨도 유령이 있다고 믿으시는 건 아니죠?”
누구든 키쿠치하라의 ‘나잇값 못하고 그런 걸 믿는 건 아니겠지’ 같은 뜻이 여실히 실린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설령 유령의 존재를 진짜로 믿을지라도 아니라고 발뺌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카자마는 그런 시선에 기가 눌리거나 발뺌하거나 할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키쿠치하라도 이를 알기에 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기도 하였다. 다 먹은 그릇 옆에 구긴 휴지를 내려놓은 그는 그 말에 글쎄, 그 한마디를 첫 마디로 입을 열었다. 있으면 어떨까. 키쿠치하라의 눈썹이 실망으로 축 늘어졌을 때였다.
“형의 유령이 있다면 만나고 싶을 것 같긴 하지만, 있다 해도 여기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모르겠다.”
“…….”
사실이었다. 또한, 키쿠치하라의 귀에도 그 말은 사실로 들렸다. 만약 그의 형이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면 지금은 타마코마 지부로 불리는 구 보더 건물에 나타나지 생전 와본 적 없는 현 보더 본부에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잠시 후 키쿠치하라는 달갑지 않다는 태를 숨기지 않은 채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태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라고요, 카자마 씨.”
“그런가.”
“유령 같은 거,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안 되고요.”
“그렇겠지.”
“다들 먹었으면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우타가와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으로 그들 사이에서 유령에 대한 소문, 그에 대한 화제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어떤 결론도, 명확한 결말도 나지 않은 것이 실로 유령 이야기다운 결말이기도 하였다. 이 유령 소리에 대한 괴담은 추후 블랙 트리거에 대한 괴담으로 옮겨지나 아직은 알 수 없을 때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자리에는 식기를 정리하고 의자를 밀어내느라 달그락대고 끼익해대는 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밖에 없었다.
What's in Your Name
生駒
장기를 그만두고 앞으로는 무얼 할까 고민하는 중에 ‘재능이 있다’는 권유에 다시 한번 넘어간 것은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외계인을 대적하는 방위부대로 스카우트 된 그, 미즈카미 사토시는 그 덕에 다시금 생긴 ‘소속’이 한동안 허했던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주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을 했다. 부대를 이룰 만큼은 모인 동향 사람들 덕에 연고도 없는 타지에 혼자 머무르는 것을 염려하는 친지의 걱정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눈에 든 모든 것까진 아니더라도 많은 것이 마음에 들 수 있었으니 그래도 이번에는 대진운이 제법 좋았다. 그는 누구와 지금 수를 주고받고 있는가. 누군가의 눈에는 훤히 비칠지 몰라도 그의 눈에는 그만큼 환하게 비치지 못하는 ‘이다음의 시간’이 그의 대전 상대이고 평생 이어갈 대국의 상대겠다.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미즈카미의 상대는 이제 그뿐만이 아니게 되었다는 이야기겠다.
수읽기는 지난날 지겨울 정도로 해왔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몸이 아닌 ‘머리’에 밴 움직임, 행동, 싸움이었다. 직접 몸을 움직여 살아 움직이며 심지어 덤벼오기까지 하는 외계인에게 대항하여 살아남고 무찔러야 하는 ‘그다음의 대전 상대’, 네이버를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녹록지 않았다. 전투를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선 그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렇게 다시 ‘초보자’로 돌아가는 기분. 그리고 직접 전장의 말이 되어 지시(직접적인 전투 지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내리는 간부진들의 지시를 뜻한다)대로 움직이는 기분. 생소하면서도 그가 이미 ‘아는’ 움직임을 재현하는 기분. 그런 기분을 맛봤다. 그동안, 미즈카미는.
또한…….
그런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부대의 이름은 대장의 성을 따와 붙여졌기에 미즈카미가 속한 부대는 ‘살아있는 장기 말의 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것은 미즈카미에게 기묘한 감상을 안겨주었는데, 그리하여 감히 품고 만 생각을 그동안의 미즈카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을 했었는데, 지금. 그는 그것을 토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계기로 인해. 예를 들어, 지금 그가 누군가를 업고 있는 까닭에. 베일 아웃에 재밍을 거는 기술은 언젠가 반드시 개발되리라 강하게 예측된 기술이었다. 단지 그때가 지금이며 그 피해자가 저희가 될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그러니 거기에 느끼는 기분은 유감이었고, 미즈카미는 온통 유감으로 가득한 순간에 입을 열고 있었다.
미즈카미는. 미즈카미 사토시는 말한다. 나는.
당신의 이름이 싫었다.
당신의 이름이 싫었어요. 이코마 타츠히토 씨.
장기 말들은 살아있어선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
장기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공격하는 장기 말이 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례가 되고, 선언이 있거나 있지 않은 뒤 말을 움직이면 그것으로 공격은 이뤄졌고 그것으로 공격이 끝났다. 그것에 성공과 실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는 말 하나하나의 단위에서 일어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때론 출혈을 감수하고 뻗은 수 하나로 태세가 전환되고 판국이 바뀌기도 하였다. 출혈은 곧 말이 상대의 말로부터 공격당하는 것을 의미하니, 랭크전의 전술은 이와 달랐다. 이와는 달라 이처럼 명확하게 수행되지 않았다. 랭크전에서는 공격하는 장기 말이 지는 일도 종종 벌어졌고,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였다. 저희 역시 저희를 공격하는 이들을 역으로 무찌른 전적이 꽤 되었으니 일방적으로 패배하지도 아니했다. 그렇지만 응, 역시. 장기 말 같은 비유는 적절하지 못했다. 미즈카미는 자신을 포함하여 이곳에 속한 이들 전부를 장기판에 올려진 말이라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누군가는 그렇게 섬뜩하리만큼 객관적이고 타산적이고 인정 없이 사람을 계산할 수 있겠으나 미즈카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즈카미에겐 다른 부대도 아니고 하필 딱 제가 속한 부대에 붙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아니했다. 살아있는 장기 말이라니, 인명이란 걸 알아도 좀처럼 마음에 들진 않는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이코 씨.
이코 씨?
안 되나요?
아니, 상관없어. 그보다 별명으로 불릴 만큼 친해졌다니 엄청 감동했다.
감동받을 것도 많네요. 싫은 건 아니고, 저도 좋아요.
좋아요, 저도.
저도…….
사람은 장기 말이 아니다. 이 당연한 말 뒤로 더할 말이 있다면, 장기 말은 살아있어선 안 된다. 미즈카미는 그런 말을 덧붙일 생각을 했다. 왜냐면, 살아있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니까. 대국이 시작되면 반드시 종국이 있듯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게 되니까.
죽어선 안 되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므로, 역으로 장기 말은 살아있어선 안 됐다. 그리고 장기 말은 사람이 아니다.
*
부대의 오퍼레이터 호소이 마오리는 이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그 말은 개개인이 자유롭게 개성을 뽐내는 이 부대의 모토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곧 어디에서든 유용하게 끌어 쓸 수 있는 격언과도 같은 말이 되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 그게 무엇이든. 설령…….
설령 생존이라 할지라도…….
*
한때 프로를 목표로 했던 만큼 미즈카미는 대국을 마칠 때의 예절에 대해서도 익히 잘 알았으며 그것은 그의 몸에도 배어 있는 움직임이 되었다. 어떤 결과든 그에 승복하는 바른 자세는 어느 순간에서든, 어떤 기분에서든 상관없이 지켜야 할 기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기본을 따르기가 매우 싫었다. 그러나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지독히도 밴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일찍이 정해진 말을 입 밖으로 내게 했다. 아, 싫은 기분이 들었다. 몹시 싫은 기분에 휩싸였지만 미즈카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이 아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코마 부대, 귀환했습니다.
등에 업은 당신이 너무나도 무겁다. 나는 이토록 무거운 장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말했잖은가, 장기 말들은 살아있어선 안 된다고. 살아있어선 안 된다고…….
살아있어선…….
*
생존자는…….
선공
선공은 “선공”이 되었다.
모두가 모두를 곧 서로를 경계할 때 선공은 소리 없이 날아들어 앞서 타인의 목을 베어낸 자의 발목을 잘라내었고, 그것으로 그들의 난전이 재시작되었음을 모든 이 앞에서 명징하게 선포했다. 그 선언자, 선공을 가한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를 악물었는데, 그것은 마치 조금 전 상황에―그러니까 동료의 목이 베어진 상황에 분노한 것처럼도 보이는 얼굴을 보이게 했다. 실상 그렇게까지 분노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랬다. 그를 포함하여, 이 전투에서 실제로는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목을 베인 자도, 발목이 잘린 자도. 영구히 남을 부상이나 상실은 일찌감치 절개해 낸 세상이었기에 그 때문에 분노할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분노한다면 계획이 어그러지고 작전이 뒤틀린 상황에 분노하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그렇다고 단순히 분한 감정을 넘어 ‘분노’까지? 그럼에도 여기, 노한 것처럼 보이는 자는, 물론 그가 진정으로 노했다는 가정 아래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전술한 까닭처럼 그들이 패배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노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상실이 아닌 상실에, 부상이 아닌 아군의 부상에, 그걸 입힌 자의 정당한 ‘행태’에 마치 분노한 것처럼, 분노한 것 같은 자신을 보이며 공격을 가했다. 두 사람 중 이 분노의 대가를 치를 자는 누구인가 가늠하듯 오랫동안 시선을 하늘로 고정한 그는, 시선을 내린 뒤에도 오랫동안 침묵한 그는, 실제와 허상을 착각할 정도로 분별없는 자가 아니었으나(그랬다면 그는 지금의 개인 순위에 머무르지도, 자신의 부대를 지금과 같이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지는 상관없이 그 자신을 그렇게 보일 수는 있는 자였다. 의도한 바이든, 아니든. 마치 어지간해선 그 앞에서 그의 동료를 이탈시키는 것이 실제든 허상이든 좋은 판단은 절대 아니라는 듯이. ‘선공’을 가한 자는 그가 아니라 그의 동료를 ‘해한’ 자라는 듯이.
뻗어나가는 검격에는 소리가 없었다.
불필요해진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금 같이 사고의 아주 작은 틈, 지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되던 소리, 선언 없이 분노를 받아낼 대상으로 ‘선정’한 자를 향해 검격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신체의 일부를 잘라낸다. 찰나의 순간 눈치채고 도약하지 않았더라면 똑같이 잘라낸 것은 목이 되었을 검격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에는 목. 일찍이 모두가 합의한 규칙에 따른 것이며 모든 부상은 영구하지도 않거니와 고통 또한 스스로 선택한 만큼 외에 느끼지 않는 무통의, 가상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되갚아주는 것이야 말릴 일이 아니라만 어째서 범위를 넘어서 온당치 못하게 느껴지는 분노는 왜일까? 무얼까? 과하지 않나?
그러나 설령 과할지라도.
그런 사람이기에 그 아래 모인 자들이 따르는 이들의 대장이었다. 그는.
그것이 그들의 대장 된 자의 ‘대장 됨’이었다. 그 과함이.
각 부대에는 부대마다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대장들이 존재했으며 그는 그중 그러한 성격을 가진 대장이었다. 분노하는 자. 분노할 줄 아는 자. 되갚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선공을 가한 건 그쪽이 먼저였다, 고 말하는 자. 그러나 그 말에 소리는 없었다. 소리는 불필요했다. 소리가 끼어들 틈 없이 몰아치는 선공. 아니, 신공이다. 강자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자의 검이 휘둘러진다. 벽을 베고 집을 갈라 이윽고 그 앞의 그 외의 모든 방해물을 치워낸 그 뒤로. 다시 말해 대상으로. 소리 없이. 소리 따윈 필요 없이. 신공에 다다른 선공이란 이러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호를 그리며, 베어져 마땅한 대상을 향해 검이 휘둘러진다. 검을 휘두른다. 호를 그리며.
호號를 드리우며.
이코마 선공
최종전 곧 시작합니다
맹점
“누구한테 말하는 거예요?”
어딜 보는 거예요?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제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란 미즈카미에게 더없이 익숙했기에 새삼 낯설게 여기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를 읽는다는 건, 수싸움이 기본인 스포츠를 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경기가 시작한 이래 판에서 단 한 번도 꿈쩍하지도 하지 않은 말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것. 장기는 겉으로는 정적으로 보여도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스포츠였고, 바로 그 장기가 한때의 미즈카미가 자랑할 수 있었던 장기였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여도 과열된 머릿속에서는 분홍색 뇌가 회색 뇌로 변할 때까지 가열하는 걸 멈추지 않는. 그 고열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게임. 누가 더 멀리 걸어가는지 내기하는 승부.
그 길에는 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는 보이지 않는 벽에 머리를 찧고는 끝이 없어야 할 길의 끝에 닿았다. 아, 여기가 드디어 끝인가 하고 손을 뻗어 벽을 만지는데, 바로 앞에, 맞은편에 앉은,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지나쳐 오는 상대가 있어 미즈카미는 제 손에 닿은 그것이 길의 끝이 아니라 자신의 끝인 것을 그제야 알았다. 저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그에게는 보인다. 아직 자신이지도 않은 자신이 그에게는 관측된다. 미즈카미에겐 앞을 가로막는 벽을 바닥에 툭 튀어나온 돌부리를 피해 가듯 가볍게 다리를 올려 뛰어넘는다. 이내, 지고 만다.
물론 미즈카미 자신도 지금껏 그가 이겨온 상대들에게 있어선 그런 자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에게 진 모든 이가 장기를 단념하진 않았던 것처럼, 미즈카미 역시 좀 더 배우고, 갈고, 닦다 보면 보이지 않는 길이 눈에 보일 수도, 그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멈춰 서지만 않는다면야. 멈춰 선다면 더는 따라잡을 수 없게 되니, 그러지만 않는다면야. 그리고 미즈카미는 그때 어떻게 했냐면…….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때가 많은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로그 영상을 보면 득점을 내는 순간마다 시선은 정면 고정. 거기에 카메라가 있는 줄 그 찰나에 어찌 알았냐고 물어봐도 이해가 되는 대답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어이없어하는 그에게 미래의 오퍼레이터 호소이 마오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버려둬. 그런 사람이잖아.
내버려둬. 그런 사람이니까.
웃기게도 건성처럼 들릴 수 있는, 그러나 호소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기에 건성으로 답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잘 아는 대답을 듣는 순간 미즈카미의 머릿속은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그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 역시 멀끔하게 정리되었더랬다. 내버려둬. 그런 사람. 장기를 그만두기 전, 스스로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며 참가한 공식 대회에서의 대국에서 패배로 끝난 판을 복기하고 일어섰을 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제 허리쯤 올까 싶을 정도로 작은 아이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옆에선 그 애의 보호자인지 선생인지 하는 사람이 아이를 달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들린 말이었다. 그 말은. 여기까지 올 정도면 예선은 통과한 영재일 텐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격이 고약한 이에게 잘못 걸려 말들이 차례차례 농락당하는, 그러한 호된 꼴을 당했다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만약 제가 정의감 넘치고 의욕이 넘치며 실력까지 뛰어난 사람이었다면 아이를 울린 상대를 찾아내 대가를 받아라―하며 똑같이 골릴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미즈카미의 대국은 이미 미즈카미의 패배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는 내버려두기로 했다.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이번에도…….
이번에도……?
미즈카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 그 세상을 보는 이 앞에서 미즈카미가 할 수 있는 것은 만담처럼 바보 소리(처럼 들리는 소리)를 하는 이 옆에서 핀잔을 놓는 것이었는데, 사실 미즈카미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해야 할 일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기에 그만하면 충분히 제 몫을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만담의 상대역을 하는 것이. 상대역이라, 제가 이기지 못하는 상대는 항상 저를 두고 앞서 나아가며 제 맞은편에 앉아 제 입에서 ‘졌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존재였을진대. 그래도 지금은 이전과 다른 점이 있기는 하였다. 너무나도 중요한 차이점이 있기는 있었다.
“그럼 갈까.”
“네!”
“또 멋대로 튀어 나가지 말고!”
“이번에는 빗맞추지 마.”
“하하, 노력해 볼게요.”
그들은 모두 같은 쪽에 서 있었다. 미즈카미 쪽에, 미즈카미 편에. 가자. 네. 가요. 미즈카미가 경계할 자도 이 중에는 없었다. 저는 보지 못한다고 해도, 제 눈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만담의 상대역뿐인 것도 아니므로 상관없다. 그는 지금의 자신을 지나치게 깔보지도 아니하며, 더는 패배한 판을 두고 앉아 보이지 않는 길 앞에 망연하지도 않다. 다만 집중할 때는 왔다. 집중할 때가.
미즈카미 부대는 없다
O captain! my captain!
신생 부대 마츠노 부대의 대장 마츠노는 랭크전 다음 라운드를 앞두고 들떠 있었다. 이번 랭크전은 그의 부대가 처음으로 참여하는 랭크전이었고, 랭크전이 처음인 건 모든 부대원도 마찬가지였다. 즉, C급 훈련생 동기들이 모여 B급으로 나란히 승급한 뒤, 개인으로서도 부대로서도 처음으로 랭크전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라운드에선 믿기기 힘들 정도로 큰 점수를 올리며 대승. 두 번째, 세 번째 라운드에서도 승승장구한 그들은 B급 하위에서 중위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보더 대원들의 눈길까지 제법 끌면서 말이다. 이만큼 빠른 진입 속도는 드문지라 오래전 전설로 남은 타마코마 제2부대의, 첫 랭크전에서 B급 2위까지 올라갔다 이듬해엔 A급 부대가 되는 데 성공했다는 바로 그 전설을 연상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의 타마코마 제2부대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듣기로는 부대를 결성한 목표가 있었고 목표를 이룬 뒤 각자의 뜻에 따라 해산했다고도 한다. 사실인지는 모른다―전설적인 선배들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 자신들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감정이 상당히 무디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이제 막 중위에 진입한 이들이 그들의 후계를 자처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물론! 다음 라운드에서도 지금처럼 점수를 얻는다면 B급 상위를 노릴 수도 있겠지만!? 들뜬 기분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마츠노는 그와 별다르지 않을 만큼 들뜬 부대원들을 힘겹게 진정시켰다. 자자, 다들 진정하고 다음 상대를 분석하도록 하자. 그래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어디를? 상위를!
B급 하위야 실력이 다들 고만고만하지만, 중위부터는 만만치 않은 전투원들이 포진되어 있다고 들었다. 저번 랭크전에선 상위에 속했던 부대도 있으며, 간혹 부대 순위는 낮으나 개인 랭크는 높은 전투원도 포함되어 있을 때가 많다고도 했다. 그치만 미리 겁을 지레 먹고 물러설 수야 없었다. 자! 그래서 우리의 다음 상대는……. B급 중위 중에선 최상단에 랭크되어 있는 부대를 발견한 마츠노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상위에 진입했으나 대진운이 영 좋지 못한 탓에 임시로 순위가 하강한 부대라고들 했다. 중위에 머무르는 것이 ‘임시’로 칭해질 정도의 실력을 갖춘 부대. 가장 곤혹스러운 적이 될 것이 분명하니 가장 먼저 살펴도 무방하리란 결론이 나왔다. 물론, 그들은 상대가 누구든 모조리 꺾고 상위로 진급할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 결심을 품은 채 모여 앉은 부대원들에게 손짓했다. 첫 번째.
“이코마 부대.”
그리고 대패했다.
대패하기 전 작전 회의 시간, 당연하지만 각 부대에 관한 정보 조사가 이뤄졌다. 실질적인 부대장은 슈터인 미즈카미 사토시. 어태커가 파고들면 슈터가 이를 지원하고, 기동성 좋은 스나이퍼가 적들을 경계하며 보조하는 3인 구성. 대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있다는 점은 의외였으나 연차가 꽤 쌓인 선배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사연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코마 부대? 지금도 강하긴 하지만 이코마 씨가 계실 땐 대단했지, 아주.’
제3차 대규모 침공 당시 부상으로 사실상 은퇴했지만 그러지만 않았어도 4인이란 인원수를 살린 다각도 공격에 뼈도 추리지 못한 부대가 한 보따리는 더 늘었을 거라고, 다소 과장 섞인 표현이긴 하지만 부러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복귀에 대한 말은 없어 갑자기 대장이 돌아와 인원이 추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그 점에선 안도했다(이 역시 타마코마 제2부대에선 있었던 일이라고도 했다. 랭크전 중 부대원 영입은 규칙 위반이 아니다). 모든 부대가 다 그렇겠지만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했던 부대였기에 대장이 은퇴 의사를 명확히 밝히기 전까지는 부대의 이름도, 구성도 변경 없이 유지하기로 했다는 뒷이야기엔 조금 궁금증이 일었다. 명확한 은퇴 의사? 그 말에 머리를 갸우뚱했으나 답을 듣기엔 훈련 시간이 다 됐다며 작별하는 선배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패했다.
강조해서 두 번씩이나 말하는 이유는 달리 없었다. B급 상위의 벽을 넘겠다 어쩌겠다 하기 전에 중위의 선배 부대들부터 꺾지 않으면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제3차 대규모 침공 당시 자신을 구해 준 보더 대원에 감명받아 입대한 마츠노는, 알고는 있었지만 그다고 쓰리지 않을 수 없는 패배에 한참을 우울해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아직 랭크전은 끝나지 않았다. 승점을 올리고 재도전에 성공한다면 아직 상위로 진입할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그래. 그만 우울해하자. 그럴 시간에 로그라도 하나 더 보도록 하자. 그런 마음으로 작전실로 향하던 그는 때마침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트리온체가 아닌 본체로 복도를 지나가는 미즈카미를 발견했다. 트리온 전투체를 해제한 것을 보면 방위 임무는 아닌 듯한데 아직 낮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걸까? 궁금했지만 어쩐지, 말을 걸 수 없었다. 랭크전에서 져서 분한 감정은 랭크전에서 되갚아주면 그뿐인지라 그가 껄끄럽다거나 싫다거나 해서 드는 망설임은 아니었다. 그저 저를 발견하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그에게서 어쩐지 저와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츠노에겐 사이드 이펙트가 없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잽싸게 알아채는 능력이 있었다. 음. 말 걸지 말자. 어차피 보더에 속한 이상 마주칠 일은 계속 있을 터. 게다가 전부 제 착각일 수도 있었다. 랭크전을 막 승리로 끝낸 그에게 우울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로그나 보러 가야지. 마츠노는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렸다.
*
“이겼어요. 다시 상위예요.”
가습기에서 이따금 삑삑 소리가 나는데 정상인지는 몰랐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소리가 거슬리지는 아니하여 그냥 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권유를 받았어요. 부대 이름을 미즈카미 부대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막 입단한 C급 보더 대원 중엔 이코마 지부가 따로 있는 줄 아는 애들도 있대요. 스즈나리나 타마코마처럼, 이름을 쓰지 않으니까. 웃기죠. 당신의 이름을 딴 지부라니…….
그런 건 싫다. 그런 건 싫네요.
“기리는 것 같잖아요, 당신을.”
아직 여기 있는데.
“아직 여기 있는데…….”
미즈카미 사토시는 고전을 암기하는 것이 취미인 청년이었다(그래, 이제 그는 완연히 청년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가 읽은 고전 중에는 우울을 깊은 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글들도 제법 많았다. 아무래도 사람 생각은 다들 비슷한 모양이지. 사람을 웅덩이에 빗대자면, 미즈카미란 못의 수면은 그리 투명하지 않을 성싶었다. 이름과 다르게 그는 수면보다 수심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기분으로 지난 몇 주를 보내고 있었다. 실은 몇 달을. 몇 년을, 같은 표현은 쓰고 싶지 않아요. 이코 씨.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손을 다시 흰 이불 속으로 넣어주며 미즈카미는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다 시트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지금 일어나도 지각이에요. 얼른 일어나요. 랭크전이 다 끝나게 생겼다고요. 가습기에서는 다시 삑삑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습기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당신이 들려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월 바보는 두 명
<미즈카미 부대는 없다>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1
대학에 진학하면 보더는 그만둘까 해.
그 말을 꺼낸 날은 공교롭게도 4월 1일, 만우절이었으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밝히지 않은 그의 진로를 밝힌 날, 아무도 그에게 ‘만우절 거짓말이지?’ 또는 ‘거짓말쟁이 브로콜리’ 따위로 그를 놀리듯 부르며 야유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속한 부대의 오퍼레이터 호소이 마오리는 그 말에 슈터를 새로 영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아니하였다. 어태커, 슈터, 스나이퍼가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상대가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망 안에 가두고, 이내 무너뜨리는 전법에서 슈터의 존재는 불가피했으니, 부대가 지금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추가 영입은 필수적이었음에도 그는 그랬다. 왜냐면 동시에, 꼭 그래야 할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관해선 아무 말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슈터 영입이니 뭐니 하는 건. 그러다간 어태커도 영입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적어도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미즈카미는 ‘생각해 둔 전공이 있느냐’는 오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얼마 전 진로 상담을 하였을 때 교사도 미즈카미에게 그렇게 물었다(그는 진학반이었기에 대학 진학 의사에 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와 같은 질문에 미즈카미는 그때와 똑같이 대답했다. ‘의예과요.’
“의사가 되어 볼까, 하고.”
오키가 입을 다물면 다음은 미나미사와였다. 멋져요, 미즈카미 선배! 그리곤 손을 번쩍 들며 이어 묻는다.
“근데 무슨 의사요?”
“그걸 벌써 정하나?”
앗, 그런가요? 그렇지만 미즈카미라면 이미 정해뒀을 것 같다며 덧붙이는 미나미사와의 질문은 그가 전공을 묻고 있다는 걸 시사했다. 그러나, 이를 ‘어떤 의사가 되고 싶으냐’로 알아들은 척 넘겨도 상관은 없을 듯도 하였다. 사람 살리는 의사라고 대답하는 건 아무래도 상투적이리다. 따라서 그는 그와는 다른 대답을 하였는데, 사실 그가 어떤 대답을 하였든 그는 그를 좋아하고 아끼는 이들에게서 응원과 격려를 받았을 것이고, 현실 역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아니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할 수 있어. 이미 진로를 말씀드린 부모님께도 같은 응원을 받은 후였다. 그들에게선 염려와 걱정의 시선도 함께 받아야 했지만, 여기 지금 모인 이들에게선 다소 자유로움을 느낀 미즈카미였다. 역시 이쪽이 좀 더 마음이 편했다. 이를 위해 이들에게 말한 것이기도 했다. 미즈카미는.
2
미즈카미 사토시는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보더에서는 한때 미래의 간부 후보 중 하나로 고려되기도 한 인재 중 하나였다. 그런 만큼 아무런 조치 없이 기관을 빠져나가기엔 아는 것이 많았지만, 은퇴 의사를 밝힌 후 상층부와 나눈 어떤 대담으로 그는 기억을 지우는 조치를 회피하고 무사히, 온전한 기억으로 보더를 은퇴할 수 있었다. 그가 상층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밝히는 사람이 없어 불명이었으나, 수년 후엔 그를 알았던 모두가 그 내용을 다소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미즈카미는 보더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투원으로서는 아니었다. 흰 가운을 입고 의무실에 몇 없는 팔걸이의자를 차지한 그는 보더 본부 의무반에 소속된 의사가 되었다. 자신의 직업이 퍽 마음에 드는지 휴식 시간에도 의무실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는, 의외로 장기를 아주 잘 둔다는 소문이 도는 의사. 그럼에도 퇴근할 시간이 되면 시간에 딱 맞춰 퇴근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의사. 미즈카미는. 물론,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가졌는지라 불가피하게 퇴근 시간을 넘겨 환자를 보아야 할 때가 오면 군소리나 불평 따위 전혀 늘어놓지 않고 성실히 환자를 보는 것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자신의 직무에 언제든 진지하게 임했다. 그럴 생각, 각오도 없이 보더에 지원한 것은 아니기에.
이따금, 그가 의무실 자기 자리를 일과 중에 비울 때, 그때 그를 찾으려면 보더의 전투원 ‘진 유이치’를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도 함께 돌게 되었다. 다만 그들은 매번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기로도 유명해서, 초창기(보더 설립부터 약 5년 후까지를 의미한다)에 보더에 입대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관계를 짐작하기 어려워했다. 그들은 매번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변을 나누고 헤어졌다.
아직일까요.
아직이네.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고, 별다른 일이 있지 않는 이상 그들이 그날 다시 만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즈카미 선생에게 뭔가 매일, 미래를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사람이 그처럼 진에게 미래를 묻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감히 그럴 수도 없었다. 어쩌다 미즈카미가 오래전 보더에 소속된 전투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보더 대원은 베테랑 오퍼레이터 호소이에게 ‘두 사람이 같은 부대에 속했던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런 적 없다는 대답을 들으면 의문은 다시 미궁 속 제자리로 돌아가 자리에 앉는다. 뭘까? 그럼.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 흐른 뒤였을지도 몰랐다. 알지 못해도 상관없는 긴 시간. 그 시간을 가늠하는 것도 기억하는 자들에게나 맡겨두면 족했다. 아무래도. 호소이는 멀어지는 어린 이들의 등을 응시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공교롭게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그에게 ‘만우절 거짓말에 속았지?’ 또는 ‘속았대요, 바보 브로콜리~’ 따위로 그를 부르며 놀리지 아니했다.
“어? 그러고 보니 미즈카미 선생님은요?”
본부에 오기 전, 자전거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보고 달려가다 삐끗한 발목도 혹시 봐줄 수 있느냐며 온 중학생 보더 대원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 말에 의무실 당직을 맡은 이가 대답한다.
“미즈카미 선생님은 오늘 휴가 내셨어.”
“아침엔 계시지 않았어요?”
“갑자기 쓰셨으니까.”
진과 대화를 마친 직후였다고 한다.
아직이네, 라는 말은 만우절 거짓말.
가 봐, 얼른.
그러면 올 4월의 바보는 미즈카미로 확정해도 되겠다고, 진은 급하게 멀어지는 등을 보며 미소 짓는다. 진이 본 미래에서 그는 바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문간에 서 있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아.
올 만우절에는 거짓말처럼 다가온 기적이 있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