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를 이탈하는 소행성처럼
- gwachaeso
- 4월 7일
- 28분 분량
<HQ!!>
오이카게
날조 전개 주의
1
체육관에 늦게까지 남아 연습을 계속하던 때였다. 평소라면 한순간도 혼자가 아니었을 텐데, 지지 않고 저와 합을 맞추던 바보 녀석의 동생이 오늘 생일이라는 모양이었다. 대신 내일은 더 일찍 와서 먼저 연습하고 있을 테니 각오해. 코트와 체육관을 떠나면서도 어깻바람이 잔뜩 들어 있던 히나타였다. 페달을 신나게 밟으며 교문을 넘는 모습에 뒤늦게 와 사정을 모르는 1학년들의 얼굴엔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라, 히나타 선배 오늘은 그냥 가세요? 웬일이야? 동생 생신이시란다. 네트 너머로 공과 함께 던진 타나카의 설명에, 아하, 하고 받아내는 1학년들은 아직 리시브가 서툴렀다. 단기간에 급속도로 좋아지기는 어려우니 꾸준히 갈고 닦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 것이다. 다음! 우렁찬 외침에 카게야마도 슬슬 물통을 내려놓고 손을 닦았다. 제 차례가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2학년이 되면서 체육관 열쇠는 카게야마와 히나타, 두 사람 손에 맡겨졌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을 보다 못한 주장 엔노시타와 고문 교사 타케다의 결정으로 이뤄진 호의이자 편의였다.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간수 못하면 내가 졸업할 때까지 너희 손에 체육관 열쇠를 맡기는 날은 없을 거야. 엔노시타 뒤에 졸업한 언젠가의 사와무라가 잔상이 되어 어른거리는 바람에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그때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카게야마.”
거기다 카게야마에게만 제약이 더해지는 것도 그때와 같았다. 히나타를 먼저 보낸 다음 카게야마를 붙잡은 엔노시타는 엄한 목소리로, 그러나 걱정과 염려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를 제약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인지도 몰랐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오버워크는 금물이라는 거, 설명 안 해도 잘 알지? 과한 의욕이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을 모조리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건 알았다. 조금은 굳어지고, 또 조금은 구겨진 얼굴로 대답해서 조금은 미안할 따름이었다. ……네. 알고 있으면 됐어. 자, 이제 우리도 가서 연습하자. 넵.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앞서가는 그를 따라갔다. 그의 걱정을 이해한다. 염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겨울 카게야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가는 큰 부상은 없었다. 발목은 접질리고 팔엔 금이 가서 뛰지도, 공을 쥐지도 못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다행히 개학식 전에는 깁스를 풀 수 있었다. 그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재활이 되겠다.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지만 무뎌진 감각이 손끝에 걸리적거렸다. 아무래도 손에 익기보단 눈에 익는 것이 먼저다 보니 눈을 따라가지 못하는 손에 좌절하는 일은 흔한 일이라고 위로한 사람은 야치였다. 배구는 아니고 그림 그릴 때 자기 경험이라고 황급히 덧붙인 그는 매니저로서 카게야마의 재활에도 참관하여 문제점을 꼼꼼히 분석하고 개선점을 제안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마웠지만, 또 고맙다고 인사는 했지만, 말재주가 영 없는 제가 제대로 인사했는지는 지금 돌아봐도 자신이 없었다. 다만 매니저로서 당연히 할 일이라고 환하게 웃었던 야치를 생각하면 마음은 전해진 듯하였다. 비록 그 직후 얼른 다 나아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퐁 쏟아내고, 때마침 돌아온 히나타와 타나카, 니시노야가 그 모습을 목격하는 바람에 또 무슨 지옥의 언변을 뽐냈기에 애를 울린 거냐는 오해를 사야 했지만, 이 역시 지금은 지난 일이다.
사고 전의 기량을 회복한 지금은 늦게까지 공을 올려도 이전처럼 걱정을 사지 않았다. 저 역시 과하게 무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늘도, 지금 틔워 올린 이 공이 마지막. 끝. 떨어지는 공이 목표한 페트병을 정확히 쓰러뜨리는 걸 보며 카게야마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신의 연습량을 정확히 기억하고 헤아리고 있었다. 오늘 그는 조금도 무리하지 않았다. 그러니 평소보다 조금 더 갑갑하고, 숨이 막히고, 목이 메는 것은 연습 탓이 아니다. 아마도 낮에, 방과 후 연습이 시작되기 전 타케다가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부터일 것이다.
“연습 경기가 잡혔어요!”
이제는 예전처럼 수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전화를 걸지 않아도 쉽게 연습 경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한 경기 한 경기에 기쁨을 숨기지 않는 타케다의 눈이 반짝거렸다. 새 학기가 시작된 후 첫 연습 경기이기도 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특히 새로 입부한 1학년들의 열의가 대단했는데, 어쩌면 주전으로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들뜬 그들은 빨리 상대를 알려달라며 타케다를 재촉했다. 2학년, 3학년도 아직은 조금 더 선배다운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쓸 뿐, 씰룩거리는 코와 입술이 그들의 기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몰려드는 학생들로 인해 곤란해하는 타케다를 보다못해 손에서 그가 든 쪽지를 쑥 빼내어 든 사람은 코치인 우카이였다.
“상대는 지역 강호인 아오바조사이 고교다. 일명 세이죠. 알지?”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인터하이 때 아쉽게 패배했다가 봄철 대회 때 설욕한 이야기가 유명했기 때문에 1학년들은 더욱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도 안 질 거예요. 그쵸!? 아, 그야 그렇지. 이겨야지, 그럼. 손을 짝짝 맞부딪쳐 주면서도 2, 3학년들의 시선이 카게야마로 슬쩍슬쩍 향하는 걸 타케다와 우카이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연습이 시작되고 타케다와 우카이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뒤 엔노시타가 잠시 불려갔고, 세 사람이 차례로, 가끔은 동시에 고개를 젓고 끄덕이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많았으나 대화 내용을 들은 학생은 없었다. 이후 히나타가 평소와 달리 일찍 귀가하고, 히나타의 귀가에 영향을 받았는지 다른 학생들도 슬금슬금 발을 빼기 시작했지만 카게야마는 평소와 같았으므로 마지막까지 체육관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었다. 묵묵히 뒷정리를 도와주는 엔노시타를 진정 위한다면 그에게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옳았지만, 카게야마는 기어코 입을 여는 자기 자신이 조금 더 곤란했던 것 같다.
“요구사항이 있었죠?”
다만 엔노시타는 카게야마의 질문을 예상하였는지 표정으로 드러내는 감정의 변화는 적었다. 누가 누구를 곤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같았다. 엔노시타는 주장으로서, 선배로서 후배이자 동료인 카게야마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엔노시타는 그가 이 정도로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호했다.
“아니.”
아무리 카게야마라고 해서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그에게 바로 거짓말이지 않냐고 따질 순 없었다. 그러나 엔노시타는 카게야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카게야마. 나는 너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요구사항은 없었어.”
“그럼 선생님과 코치는…….”
“다른 이야기였어. 이번 연습 시합은 아오바조사이 고교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 맞지만 별다른 요구사항은 없었어. 사실이야.”
엔노시타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늦지 않게 대답했다. 네.
엔노시타가 ‘그래’라고 대답했다면 그다음 문답은 다음과 같이 흘러갈 수도 있었다. 그래. 그럼 카게야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몰랐다.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고요. 맞아. 저는 저 때문에 곤란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너 때문에 곤란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이 역시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엔노시타는 역시 ‘아니’라는 대답이 좀 더 사실에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의 질문이 ‘아오바조사이 고교의 요구사항’에 관해 묻는 것이라면 그렇기 때문이었다. 1년 전 카게야마를 풀 타임 세터로 출장할 것을 요구한 세이죠의 이리하타 감독은 이번엔 아무런 요구사항을 걸지 않았다. 세이죠가 먼저 제안하는 연습 시합인데 카라스노 고교가 요구사항을 내세우면 모를까 세이죠가 거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긴 했다.
그러므로 세이죠의 요구사항이 아니다. 무엇보다 요구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타케다를 찾아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고른 학생은 분명 아오바조사이 고교의 배구부 저지를 입고 있었으나 학생인 그가 학교와 부 전체를 대변할 수도, 타교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 이윽고 그를 쫓아 황급히 달려온 세이죠의 학생들이 죄송하다고 몇 번씩 고개 숙여 사과하며 그를 끌고 나갔다. 소란이 폭풍처럼 온 주위를 순식간에 휩쓸고 나간 듯했다. 남은 것은 정적이었다.
그들을 배웅할 새도 없었던 타케다는 다만 때마침 저를 찾아온 엔노시타가 그들을 목격한 것을 보았고, 따라서 그에게는 그들에 관해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같은 3학년이자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서 엔노시타가 그들의 돌발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품은 것은, 타케다가 자교 학생을 우선하여 보호할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교사로서 자교든 타교든 학생을 보호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겠다. 그것은 그의 직업적 소명감이기도 했고, 곤란한 학생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은 선한 심성의 발로이기도 했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으음.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을 떨칠 수 없어 쓰게 웃는 타케다를 엔노시타는 너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카게야마만 괜찮다면 그를 연습 경기 동안 계속 세터로 출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니. 카게야마는 명실상부 카라스노 고교의 주전 세터고 강한 승리욕에 시합에 관한 욕심도 상당하여 연습 경기라고 출전을 거절하고 코트에서 발을 뺄 녀석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걱정을 넘어, 히나타라면 ‘카게야마의 탈을 쓴 너는 누구냐’며 카게야마의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는 상상이었다. 다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방심할 순 없고, 안 그래도 새로 입부한 1학년 중에도 포지션이 세터인 학생이 여럿 있어 실력을 확인해 볼 기회이기도 했다. 중간에 교체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걸 알기에,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이곳까지 찾아와 부탁하고 만 것이겠다. 그 애는. 세이죠의 새 주장. 주전 세터. 야하바는.
무엇이 그를 그리 불안하게 하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무엇이 가장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그 안에서도 감을 잡기 어렵게 뒤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주장이 되어 팀을 이끌어야 하는 중압감, 뛰어난 선배의 뒤를 이어 강호의 명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포지션으로서 겨루어 이기고 싶은 호승심. 그뿐일까. 더 있을까. 더 있다면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부실과 체육관을 점검하고 불을 끄고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카게야마가 열쇠로 문을 잠갔다. 엔노시타가 잠시 생각하기를, 굳이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는 연습 경기에 주전 세터로 출전할 것이다. 또한, 중간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상황이 어떻든 간에 교체되어 벤치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이는 학생 보호를 위한 당연한 결정이고 엔노시타보다도 더 주의 깊게 학생들과 상황을 면밀히 살필 타케다와 우카이가 내릴 결정이었다. 그런고로 엔노시타가 부장으로서 내린 결정은 자신이 알게 된 일을 카게야마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함구령이 되겠다. 대상은 자신이었다. 부장이자 주장이자 동료이자 선배로서 후배를 산란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부장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2
3월 현 대회의 우승 학교는 시라토리자와 학원이었으며 준우승은 다테 공고가 차지하였다. 그간 날지 못하는 까마귀라고 저희를 조롱하던 학교들을 지난 1년간 매섭게 닦아세운 카라스노 고교로선 다소 아쉬운 결과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1, 2학년들로만 꾸린 팀의 첫 출전이라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건 변명 거리가 될 수 없었다. 봄철 대회를 끝으로 3학년이 은퇴한 건 시라토리자와 학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카라스노 고교의 패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주전 세터의 부재는 분명 뼈아픈 타격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얇은 선수층에서 비롯된 문제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3학년이 은퇴한 후 1학년이 새로 입부할 때까지 카라스노에 세터 포지션의 선수는 카게야마밖에 없었고, 그전까진 3학년 스가와라 단 둘뿐이었다. 현 대회는 시기상 스가와라가 카게야마를 대체하여 출전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봄철 대회에서 고열의 히나타를 예외 없이 병원으로 보낸 타케다가 카게야마의 출전을 허락할 리 만무했다. 사실 허락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깁스를 한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당연했다.
본디 카게야마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였으므로 부상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몸을 움직였다가 초래할 수 있는 재앙에 관해 모르지 않았다. 출전이 정지된 현실에는 순순히 승복한 그였지만, 속은 말이 아닐 거라고 짐작한 주위 사람들에 의해 넘치다 못해 체할 만큼 위로받기도 했다. 그중엔 평소에 토스 기술을 좀 더 익혀둘 걸 그랬다고 자책하며 후회하는 이들도 있었고(그 뒤 타나카는 엔노시타에게 너는 리시브가 더 급하지 않냐는 이야기를 듣고 니시노야와 함께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기보단 더욱 당당하게 행동해야 의욕을 끌어올릴 수 있다며 ‘이번엔 내가 더 오래 코트에 남아 있었다’라고 선언했다가 깁스하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긴 히나타도 있었다. 발목을 접질린 카게야마는 의자에 앉은 채로, 히나타는 타케다와 함께 무릎을 꿇은 채로 설교를 듣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동시에, 두 사람의 뇌리에 스친, 다음엔 타케다가 없는 곳에서 승부를 내고 말겠다는 불순한 생각을 타케다가 어떻게 눈치채고 한숨을 쉬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었다.
거동이 다소 불편해도 불가하진 않았기 때문에 응원석에 앉아 경기를 참관하는 것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카게야마는,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고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 놀라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지금껏 수없이 많은 배구 경기를 관전하면서도 카게야마는 그 어떤 경기든 ‘보지 않는 게 더 나았다’라고 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경기 내용을 세세히 분석하고 파고들면 아쉬운 점이 보여도 언제나 그 모든 생각은 그 경기를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에서 실망스러운 경기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카게야마는 실망스럽지는 않아도 고통스러운 경기는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던 경기는 비록 전력에 큰 구멍이 뚫려버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한 카라스노의 경기가 아니었다. 경기가 끝난 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학생들은 고등학생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어렸다. 그러니 그들을 상대로 승리한 학교의 학생들도 표정이 밝을 수 없었다. 정렬 후 나란히 선 두 팀이 악수하고 헤어질 때도 기운 내, 괜찮아, 힘내,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입 모양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강호를 이겼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엔 좋지 못한 때였다. 카게야마는 딱 거기까지 보고 자리를 떠났다.
“차렷. 인사.”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불러세웠지만 정작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새 주장 대신 그가 가려질 만큼 큰 목소리를 내어 객석을 향해 인사한 사람은 그 옆에 선 와타리였다. 괜찮아, 괜찮아. 숙였던 허리를 들고 고개를 돌리면 자기 눈가도 붉으면서 야하바를 위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처음으로 주장 마크를 달고 나선 경기의 결과는 볼품없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부딪친 무릎도, 쓸린 팔도, 꺾일 듯했던 손목과 손가락도 아픔의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이날의 경기가 그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는 야하바 본인만이 정확히 알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건 추측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엔노시타는 야하바와 악수했고, 딱딱히 굳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늘 가벼운 미소를 짓던 전 주장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엔노시타 역시 사와무라와 같을 수는 없을 터였다.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작년에 만난 야하바는 가볍고 까불대기 좋아하는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어둡고 진지한 표정의 그는 얼마 전 동기와 후배의 손에 끌려 나가는 모습을 엔노시타가 보았음을 알고 있을까? 본인은 추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과거를 굳이 물어 캐낼 만큼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배려라면 배려라고 할 수 있겠고, 그 이유는 역시 굳이 배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겠다. 양 팀의 선수들이 마주 인사한 뒤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지만 당연히도 바로 시합이 시작되진 않았다. 적당히 몸을 푸는 시간을 갖는 중에 카게야마를 찾아와 인사하는 이들이 있었다. 킨다이치, 그리고 쿠니미다.
“몸은 좀 괜찮아?”
교통사고 직후 종합병원에서 검진받느라 며칠 입원했지만, 큰 이상이 없어 곧 퇴원했기 때문에 그들로선 병문안을 갈 틈도 없었다고 했다. 방학 중이었기 때문에 만나러 가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계절이 바뀌고 학년도 바뀐 후에야 겨우 안부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카게야마는 재활도 끝나 문제없다는 근황을 간단히 전했지만, 원체 말주변이 없는 관계로 세 사람 가운데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카게야마는 저희 뒤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 하는 타나카와 니시노야를 나리타와 야마구치가 붙잡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쿠니미까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킨다이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을 알아차리고서도 신경 쓰지 않을 성정은 못 되니 눈치채지 못한 것이 맞을 것이다.
카게야마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며 쿠니미가 킨다이치의 팔을 건드리며 재촉해도 킨다이치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숨을 자아내는 모습에 결국 침묵을 부수는 역할은 맡는 건 여지 없이 쿠니미였다. 카게야마. 쿠니미는 문득 그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도 네 탓이라고 생각 안 해.”
다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정반대라는 것은 아이러니했던 것 같다.
“쿠, 쿠니미.”
쿠니미는 당황하여 돌아보는 킨다이치의 옷깃을 마치 멱살 쥐듯 잡아당기며 발을 옮겼다. 네 걱정은 안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시르죽지 말라고. 우리 주장이 화나 보이는 건 그냥 우리가 못해서 그런 것뿐이야. 가자, 킨다이치.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 해. 그때쯤 나리타와 야마구치로는 부족하여 키노시타와 히나타까지 타나카와 니시노야를 붙잡는 데 가세하였으나, 종료 사인과 같은 그 말을 끝으로 더는 그들을 붙잡지 않아도 되었다. 카게야마가 입을 연 건 다들 모이라는 코치의 목소리에 둥글게 모일 때쯤이었다.
“그런데 시르죽는다는 게 무슨 뜻,”
“기죽지 말라고, 이 바보 제왕아.”
“누가 바보라고……!”
“거기 2학년! 조용히 안 해!?”
츠키시마와 카게야마의 기 싸움은 서로를 팽팽히 노려보는 꼴을 보다 못한 우카이의 호통이 떨어지면서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 말은, 2학년이 되었으면 후배의 본이 되어야 할 판국에 유치하게 싸울 정신이 있냐며 꾸지람을 듣는 두 사람을 푸흡, 비웃은 히나타에게 두 사람의 협공이 작렬하여, 코치 앞에 나란히 서서 질타받는 사람이 셋으로 늘어났다는 뜻이 되었다. 아이고, 두야. 체육관이 여기니 올 때 걸어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친 우카이에겐 미안하지만 떠들썩한 그들의 모습에 안심한 사람이 있다면 맞은편 세이죠의 킨다이치가 되겠다.
“그거 봐.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게…….”
코트 끝과 끝, 일렬로 정렬하여 마주 본 두 학교 선수들이 코트 안쪽으로 들어와 심판에게 번호를 보여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첫 서브권을 가져간 건 카라스노였다. 카게야마는 손에 쥔 공을 손 안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린 후 다잡았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공을 높이 띄워 올린 후, 두 손을 뒤로 뻗으며 도약하며 내리치는 자세에선 부상의 여파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탕! 공과 손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마치 총성처럼 울렸다. 가까이서 들으면 귀가 다 얼얼할 소리와 함께 라인을 향해 쏘아지는 공. 방아쇠를 당긴 손. 득점의 포문을 여는 카게야마다.
지난 3월 열린 현 대회에서의 실수는 예상한 것보다도 뼈저린 결과를 내고 말았다. 변명할 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더 나은 대처를 할 여지가 그들에게 있었고, 가뜩이나 심란한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들쑤시고 말았다는 사실은 늘 그렇듯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깨닫는 법이었다. 관객석 안으로는 다시 들어갈 여력이 없어 입구 계단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을 때 잠시 빠져나온 미조구치 역시 그들을 탓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급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직후 실수를 남발하기 시작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탓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으나 널브러져 있는 이 아이들 역시 3년 동안 그가 가르치고 함께 호흡을 맞춘 아이들이었다. 탓할 수 있을 리가 있겠나.
“죄송해요.”
게다가 그들의 잘못도 아닌 일로 사과까지 하는 아이들에게 더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뭘 사과까지 하고 그러냐. 음료수라도 하나씩 사줄까. 목 탔겠다. 한 명씩 툭툭 쳐서 자리에서 일으키고 난 뒤 사실 음료수가 고팠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은 숨기는 그는 여전히 아이들보다 한참 어른이었다. 잔뜩 타들어 간 목을 축이지 않으면 이다음에 말을 할 땐 목이 갈라질지도 모르겠다. 건물 안으로 다시 발을 들이는데 그사이 시합이 끝나버렸는지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아이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미조구치 뒤에 선 아이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서렸다. 간신히 유지하던 집중력을 한순간에 박살 내버린 것이 저희일진대 그들 앞에서 달리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묻는 말에 그저 대답할 뿐.
“저, 오이카와 선배는.”
대표로 입을 여는 야하바에게 마츠카와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음료수는 좀 주책인가?”
“과자를 더 사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봄, 그리고 황금 같은 주말에 과제까지 미뤄두고 모교도 아닌 타교의 체육관을 향해 비닐봉지를 양손에 가득 들고 걸어가는 선택이 과연 옳은지에 관해 고민하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뭐라도 해주고 싶은 게 신입생으로 돌아간 옛 선배의 마음이라, 염치 불고하고 잔뜩 사 들고 가는 주전부리에 담긴 마음에는 그럼에도 순수한 호의만 담겨 있진 못했다. 그렇다고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니고, 사과의 선물 정도 될까. 현 대회 이후 첫 연습 경기에 응원 정도는 가줘야 이쪽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결국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마츠카와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족한 금전과 손을 충당하기 위해 하나마키를 꼬시는 것까진 어떻게 잘 진행되었는데,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학교까진 왔지만 그중 배구부가 사용하는 체육관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 역시 주말이라고 텅 빈 학교는 아니므로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어물어 찾아갈 수야 있겠지만, 우리 애들만 입일 수는 없는 바람에 용돈을 적잖게 털어 가득 채운 대형 비닐봉지가 제법, 상당히, 대단히 무거워 진이 빠졌다. 남는 건 가져가서 두고 먹으라고 하지, 뭐. 살 때야 그리 말하며 가볍게 생각했지만 일단 거기까지 들고 가야 하는 사람은 저라는 사실을 쏙 빼놓았기에 가벼울 수 있던 생각이었다. 거기다 지나치게 빨리 들린 편의점, 그리고 버스 노선의 문제로 걸어서 넘어야 했던 언덕의 타격이 대단했다. 왜 일이 이렇게 됐지? 내가 이렇게 멍청할 리가 없는데. 마츠카와의 중얼거림에 가위바위보에서 진 벌칙으로 음료수를 든 하나마키가 울컥하여 쏘아붙였다.
“그럼 내 탓이란 말야?”
빈손으로 가면 뭐하지 않냐고, 애들에게 간식거리라도 사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건 하나마키가 맞긴 했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길 찾아야지, 길.
“아니, 또 뭘 그렇게까지. 일단 길이나 물어보자. 얼른.”
어디 바닥에 둘 데도 없어 내내 들고 와 빠질 것 같은 팔만 아니었으면 두고 보자는 눈만으로 끝내지 않았을 것을, 능청스럽게 빠져나가는 친구를 한 번 흘겨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너희도?”
“너희도.”
이런 우연이 다 있다며 재미난단 표정으로 저희를 바라보는 이들은 체육관 위치를 모를 리 없는, 모를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그들과 마주친 건 분명 행운이었으나 짐을 나눠 들 수 없는 것은 작은 불행이겠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간식거리로 추정되는 것들로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한아름 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 일단 간식 양에서는 우리 애들이 졌군. 좀 더 잘 먹이고 잘 달리도록 감독님과 코치님께 말이라도 전해야겠다며 눈빛을 교환한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가 사와무라와 스가와라를 향해 다가갔다. 맥 빠진 미소를 흘리자 오느라 고생했다며 웃은 그들이 고갯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가자. 시간을 보면 2세트까진 끝났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번엔 해 질 때까지 계속한다는 것 같았으니까.”
적당히 시간 맞춰 잘 온 것 같네. 다행이다. 함께 발을 맞춰 걷는 네 사람이었다.
3
지난겨울 3년 내내 지겨우리만큼 붙어 다녔던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일찍부터 술을 거나하게 마신 만취한 음주 운전자였고, 뒤늦게 핸들을 꺾어 전봇대를 들이박았지만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다행일까? 다행일 것이다. 만약 그가 그대로 사망했다면 그들은 영정의 멱살을 잡아야 했을 테니 이것이 다행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평면에 인쇄된 사람의 멱살은 잡을 방도가 없고, 나아가 보상금이라도 제대로 받아내기 위해선 역시 그가 살아있는 쪽이 좀 더 나았다. 과연 그럴까? 그래야만 한다. 몇 달 사이 마츠카와는 자신을 설득하는 데 능숙해졌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대 주장과 3년이 아니라 10년을 붙어 다닌 친구는 저의 정신만 차리기에도 바쁠 때 저보다 더 정신없는 친구의 가족을 대신하여 분주하게 돌아다니거나 자리를 지키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그쯤 지내면 가족들끼리도 면이 있어 일가족 모두가 팔을 걷어붙였다는 것 같았다. 다만 사고에 얽힌 집안만 셋이나 되고 법적인 문제나 금전적인 문제, 즉 어른들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주다 보니 그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딱 그 정도뿐이라 그것마저 빼앗길 수는 없어 고집한 것 같은 느낌도 없잖았다. 그러니 괜찮아. 솔직히 난 힘든 것도 없어. 힘든 건……. 그래도 말끝을 흐리는 그의 얼굴엔 3년 동안 보아온 이래 가장 짙은 먹구름이 껴 있었다. 쉽사리 걷힐 것 같지 않은 우울감이 저에게도 번져왔지만 발을 떼었다간 영영 멀어질 것 같은 기분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사고가 있던 계절이 바뀌기 전이었다. 때는 아직 겨울이었다.
3월쯤 되었으면 계절이 바뀌었다고 보아도 무방할까? 심부름만 끝내고 곧장 출발하겠다는 이와이즈미를 두고 남은 3학년들끼리 현 대회 경기를 보러 갔을 때였다. 간신히 손에 넣은 1세트가 무력하게 2세트는 너무 간단하게 빼앗기고 말아 걱정이었다. 시작부터 고전을 면치 못한 3세트도 슬슬 무르익을 때쯤. 일찌감치 두 번의 작전 타임을 모두 써버린 것이 아쉬운 때에 하나마키의 전화기가 울렸다. 어, 이와이즈미. 어디쯤 오고 있냐? 이러다 너 오기도 전에 끝나게 생겼어. 하나마키가 하려던 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으니 아마 위와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야 그럴 것이 1세트가 끝나고 2세트가 끝나도, 늦어진다 연락 한 통 없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 전화를 거는 대신 내내 중얼중얼 읊조리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마키가 말할 수 있었던 건 딱 이름까지였다. 마츠카와는 그때를 조금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너, 울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경험은 아무래도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러했기 때문이다.
아, 쓸데없이 팽팽 잘도 돌아가는 머리란. 우리의 에이스 이와이즈미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성격은 아니었다. 봄철 대회, 우리의 마지막 시합에서 지고 난 후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에이스가 아니었나. 그러나 이제 와 그리 분할 일이 무어 있나. 화날 일이, 슬플 일이…….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하나마키의 뒤를 쫓아 관중석 밖으로 빠져나가는 육신이다. 저희의 모습을 경기장에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때는 정말로 신경 쓰지 못한 걸 넘어 신경 쓰지 않았으니 실수보다는 잘못이 더 적확한 표현이렷다. 나중에야 몇 명은 좀 남아있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그 몇 명을 자처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야 그렇지 않나. 그야…….
“그야 이렇게 될 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좀 예상을 부수는 전개로 가야 하지 않나? 옆에 선 하나마키가 속 터지는 소리 하지 말라며 걷어차는 걸 여유롭게 피했다. 그 소리조차 악문 잇새로 나온지라 코트까지 닿진 않았을 터였다. 하나마키. 나보다는 저쪽을 보라고, 저쪽을. 아직 시간은 많고 하루는 길지 않냐며 위로하면서도 개운한 얼굴을 감추지 않는 카라스노 쪽 말이야. 그래도 여기까지 안내해준 호의가 있고 같은 시기에 함께 배구를 했다는 미묘한 동질감이 있어 입 밖으론 꺼내지 않은 푸념이었다. 게다가 이젠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승패에 관련 없이 코트를 뛰는 모든 이들에게서 흡족함을 느끼는 마츠카와였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그들이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점수판 가운데에 적힌 숫자가 1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럴 일도 없지 않았을까? 아직도 1세트 중이라고? 같은 그런 순진한 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뭐야, 너희들이 여긴 왜 왔어?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던 이리하타 감독과 미조구치 코치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저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던 것이 생각났다. 당연히 애들 응원하러 왔죠. 학교 다니느라 바쁠 텐데 무슨……. 어련히 알아서 할 애들인 거 알잖냐. 그러나 그러면서도 눈을 피하는 미조구치의 눈을 집요하게 쫓는 하나마키와 큼큼 헛기침하는 이리하타에 조용히 눈을 접어 웃는 마츠카와였다.
“…….”
“…….”
감독님이 저희를 워낙 잘 가르쳐주셔서 저희 눈이 아직도 이렇게나 밝네요. 하하. 하하. 그러냐. 물론 코치님도 저희를 잘 이끌어주셨고요. 허허. 허……. 결국 미조구치가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겠다고 혀를 차는 사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린 이리하타의 안색은 역시나 썩 밝지 못했다. 어디가 문제예요? 곁에 바싹 붙지 않으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으면 고갯짓으로 대답하는 이리하타였다. 가리키는 자리엔 눈가로 침범하는 땀을 닦아내는 야하바가 있었다. 아, 우리 새로운 지휘자께서. 코트에 들어선 아이들의 면면을 보면 3학년이 된 야하바, 와타리, 쿄타니에 2학년 킨다이치, 1학년으로 보이는 모르는 얼굴 둘이 섞여 있었다. 야하바가 벌써 쿄타니를 제대로 다뤄내기 시작했나? 생각하기 무섭게 쿄타니와 야하바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여 마츠카와는 조용히 생각을 수정했다.
“쿄타니 목줄을 잡고 있기가 쉽지가 않지.”
“오이카와도 애먹은걸요.”
“거기다 좀처럼 여유가 없어. 무엇보다 주장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니…….”
아직 시간이야 많지만 반대편을 보면 확실히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3학년이 되어 주장을 맡은 엔노시타에, 리베로에는 니시노야가, 미들 블로커로는 츠키시마, 히나타가 있고, 윙 스파이커 타나카에 세터에는 카게야마가 있었다. 잠깐 곁눈질한 것만으로도 이쪽보다 훨씬 단단하고 안정된 기반이 느껴지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끝날 때까지 애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는 말에, 같은 명령을 듣고 물러난 카라스노 OB 들과 합류했다. 하나씩 가져온 과자 봉지를 뜯으며(“이렇게나 많으니까 괜찮아!”) 저희끼리 먼저 조촐한 다과회를 즐길 때였다.
“카게야마의 서브는 전보다 더 무시무시해진 것 같네.”
방금 또 쾅 소리, 또 서브 득점이지? 그 말대로 라인 바로 옆에 내리꽂힌 공에 종이컵을 꺼내던 하나마키가 몸서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음료수 페트병의 뚜껑을 열던 스가와라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그가 오늘 몇 개의 서브 에이스를 기록하는지 내기를 해도 맞출 자신이 없었다. 일단 여기 와서 그들의 눈으로 본 것만 세어도 슬슬 한 손을 다 접을 지경이니, 오늘 안에 두 손을 다 채우고 접은 손을 다시 펼쳐 헤아리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아 보였다. 다행이네. 괜찮아 보여서. 많이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야. 하나마키는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이었지만, 감자 스낵을 집어 들다 멈칫하는 사와무라와 스가와라에 아, 하고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신경 쓰이라고 한 말은 절대 아니고 그냥. 저희야말로 난처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며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은 사와무라가 다시 입을 연 건 그 뒤로 어색한 침묵이 수초간 이어진 후였다.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은 좀 어떤지 알 수 있을까?”
“실례될 것까지야. 지금이야 뭐…….”
말끝을 흐리는 하나마키의 목소리는 분명 그 뒤로도 이어져 문장을 완전히 끝마친 듯했지만, 그때쯤 되어 마츠카와는 더는 그들에게 집중하지 않았기에 바로 곁에 앉은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다. 그동안 대신 무얼 하고 있었냐면 입 속에 집어넣은 비스킷을 와작와작 잘게 부수며 코트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입 속에 든 과자를 핑계로 입을 다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 이런 핑계. 그러나 이게 핑계일까? 핑계를 대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지 않은 말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가끔, 입 밖으로 내어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꼭 내뱉어야 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마츠카와에게도 있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닌데도 하고 마는 말을 거부하고 싶을 땐 입을 꾹 닫고 저작운동에 집중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입 속으로 밀어 넣은 과자를 씹고 부수고 잘게 다져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으면, 그건 다시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으로 밀어 넣어지고 거기서 다시 출렁출렁 흔들리다 십이지장, 소장, 대장, 아무튼 그런 순서로 형태를 알 수 없게 뭉개져 다른 어딘가로 밀어 넣어지길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과자처럼 감정도, 생각도, 시간도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 넣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불행이었다. 감정, 생각, 시간이 어떻게 형체를 가질 수 있냐면, 보라, 저기 바로 있지 않은가. 마츠카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카게야마가 서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대 주장이자 3년을 저와 붙어 다닌 친구는 평소에 그리도 밉살맞게 굴며 괴롭히기 바빴던 중학교 후배를 끝끝내 바닥으로 밀쳐내어 팔에 금까지 내고 말았는데, 그러면 지는 몸 성히 보전하여 괘씸해지기라도 할 것이지 관성의 법칙인지 뭔지 때문에 반동으로 쏠린 몸을 결국 바로잡지 못했더랬다. 결과는 중상, 몇 번의 심정지. 하루에 한 번 허락되는 면회에서 의료진에 의해 복도로 물러난 이와이즈미는 그날 결국 아끼던 후배들의 경기를 보러 오지 못했고 덤으로 트라우마까지 얻은 듯하니, 손발이 척척 맞기로 유명했던 콤비는 박살이 나도 아주 제대로 박살 나, 비록 똑같이 박살 난 건 아닐지라도 어떤 의미에선 여전히 똑같은 콤비가 되고 말았다. 유감이었다. 유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의 다른 말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너는 어때.
너는 어떨까. 마츠카와는 알지 못했지만 쿠니미가 카게야마에게 건넨 말은 지극히 옳았으며 틀린 점이 없었으니, 이 순간에도 마츠카와가 카게야마를 보며 느끼는 감정에 원망이나 미움 같은 것은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을 만큼 전혀 없었다. 원망해야 할 대상은 사고를 낸 운전자이니 착각하지 않으면 잘못된 곳에 분을 풀 까닭도 없었다. 그러니 조금 낯간지럽게 들릴지 몰라도 확실히, 분명히, 마츠카와는 카게야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건 아마 그가 목격자이기 때문인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사고 당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신고하여 구급차를 부른 건 그였다. 그때 그는 그의 친구가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단 한 번 열렸다 닫힌 눈과 마주치고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빨리 좀 와주십시오. 그 말만을 반복하는 입이 수초 전까지만 해도 재미난 광경을 발견했다며 웃고 있었음을 깨달으면 입가에 이는 경련을 자각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누나와 어머니의 잔심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내쫓기듯 나오게 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구부정하게 굽힌 어깨를 펴지 않은 채 천천히 발을 떼고 있었다. 늘어지게 잔 늦잠의 영향으로 연신 하품하는 그의 눈에 가볍게 실랑이를 벌이는 친구와 친구의 후배가 들어온 것에 순전히 우연 외엔 다른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래. 둘이 또 무슨 일이야? 평소처럼 나잇값 못하고 저보다 어린 후배를 골리는가 싶었는데 웬걸, 갑자기 멍해진 표정을 짓는 친구에 졸음은 가시고 흥미가 솟았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무슨 이야기인지 몰래 들어봐야겠다. 친구가 알면 얄밉기 그지없다며 핀잔 놓을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보폭을 늘렸을 때, 와, 쟤 지금 무시당한 거야?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앞질러 지나가고 그런 카게야마의 어깨를 오이카와가 잡아채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거친 행동이지 않냐고 눈살을 조금 찌푸렸을 때는 잡은 그대로 힘껏 밀쳐내었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마츠카와는 자신이 놓친 것을 알았으니 그건 그들이 놓인 배경이었다. 아. 아. 짧은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문장을 만들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늦지 않게 튀어나와 외쳤다. 오이카와, 조심해! 그러나 부러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들에게 다가갔던 마츠카와의 고함은 굉음에 묻혀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마츠카와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은 제 목소리였다.
얼얼한 귀를 문지르며 간신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려놓았을 때보다도 더 힘겹게 걸음을 떼어 다가가면 대체 얼마나 세게 잡아 밀쳤는지 제대로 넘어져 구르기까지 한 카게야마가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를 부르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 씨? 황망한 건 마츠카와도 마찬가지였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저 역시 들릴 듯 말 듯 한 크기로 중얼거렸던 것 같다. ……야. 오이카와. ……살아있어? 단 한 번 열렸다 닫힌 눈은 질문에 응한 대답이었다. 살아있구나. 잘했어. 잘했어……. 그사이 연결된 전화의 수화기에서 넘어오는 구급대원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퍼진 자동차 타이어처럼, 다리에 어떻게 힘을 주었는지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는 결국 누가 부축하여 일으킬 때까지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4
또다시 카라스노에게 주어진 서브권을 행사하기 위해 카게야마는 코트 끝으로 물러섰다. 손 안에서 핑그르르 도는 공의 속도와 회전수는 정확히 그가 계산한 대로다. 탁, 멈춘 공을 붙잡고 올곧게 앞을 응시하면 그의 앞엔 그를 믿는 자들, 그 너머엔 그를 명백히 경계하는 자들이 몸을 굳혀 긴장하고 있었다. 성장한 카게야마는 줄자 없이도 그들과 자신의 위치를 미세한 오차로 측량하고 그 값에 따라 공이 그릴 궤적을 눈앞에 선명히 그릴 수 있게 되었으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가 아직도 성장기에 놓여 있다는 점이겠다. 주심의 호루라기가 울린 뒤 서버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몇 초 되지 않지만 카게야마에겐 충분히 긴 시간이다. 공을 올린다. 팔을 뒤로 뻗는다. 도약하여 내리친다.
오래전 카게야마에겐 서브의 본이 된 사람이 있었다. 따라서 처음엔 그와 자세가 몹시 유사했으나 그건 어떤 기술을 처음 배우고 익힐 때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단계였고, 이제는 카게야마의 서브가 다른 이들의 본이 되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를 본떠 만들었던 위협적이고 강력한 서브는 카게야마 스스로 갈고 닦은 시간에 힘입어 이제는 그만의 첨예한 서브로 정제되었다. 그러나 매 계절, 대회에 임하여 같은 상대와 반복하여 시합할 때마다 뼈저리게 실감하는 것은 그 시간 동안 상대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오래전 카게야마에게 서브의 본이 된 사람의 서브를 다시 보았을 때, 카게야마는 그의 자세, 동작, 위력이 모두 전과 같지 않은 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고 적실하게 분별할 수 있었다. 더 날카롭다. 더 강력하다. 더 정확하다. 이는 그 스스로 연마한 시간에 힘입었으니 카게야마와는 다른 방향으로 뿌리를 뻗고, 카게야마라면 내지 않을 방향으로 줄기를 내어 결국엔 다른 봉오리를 피워내었다. 이제는 더 같지 않은 두 사람의 기술이다. 더는 같을 이유가 없었다. 접점은 이미 지나갔고, 다시 자신의 궤도로 돌아갈 때였다. 그뿐일 때.
카게야마에게 있어 첫 번째 접점의 끝은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그 자신의 졸업식은 아니었으니, 저는 아직 2년은 더 있어야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하여도 상황은 같을지니, 두 살 차의 애환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로 끝나지 않은 접점에 감사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당연히 예정된 재회에 감사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어린 날의 자신의 어린 날이었다.
그래도 두 번째 접점의 끝이 다가왔을 때 덜컥 위기감을 느끼는 걸 보면 조금은 성장한 걸까? 두 개의 원이 가질 수 있는 접점의 최대 개수는 두 개였다. 그 이상 갖기 위해선 완전히 겹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결국 한 개의 원이 사라진 것과 다름없어졌다. 그들이 함께 설 기회도 두 번뿐이니 이와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그와 함께 서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거야.’ 방금 누가 말했지? 돌아보면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육감의 속삭임을 무시했을 때 그는 봄철 대회 예선전에 있었다. 무시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야 그럴 리 없잖아? 물론 같은 팀으로 서는 것은 앞으로도 불가할 것을 알 순 있었다. 왜냐면, 이걸로 1승 1패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앞으로 반드시 나와 대적하는 팀을 고를 테니까. 그러나 그것이 함께 서는 것과 다른 이유가 있나? 같은 팀이든 상대 팀이든, 네트가 사이에 있을 뿐 코트는 하나였다. 그들은 언제고 같은 코트 위에 서게 될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해 우매한 주인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한 본능이 그에게 귀띔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만약이란 가정은 뜻을 잃는다. 그게 다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바라는 게 그게 다냐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네가 함께하고 싶은 게 정말 배구뿐이야?
어…….
어……?
“오이카와 씨는 대학에 진학하는 쪽인가요?”
지난겨울. 로드워크 중인 오이카와와 만난 카게야마는 저를 보고 노골적으로 ‘심기 나쁨’을 표시하는 그를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신에 더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무슨 질문이든 답해줄 건 없다며 손을 내젓던 오이카와가 그 말에 아, 하고 손을 멈추었을 때까지도 위기감은 없었다. 토비오쨩은 못 들었나 보네. 흐음. 알려줄까, 말까. 입가를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을 제게로 뻗는 걸 보았을 땐 영락없이 이마를 밀어댈 줄 알아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그러자 그리 반응할 걸 예상했는지, 아니면 도중에 목표물을 바꾸었는지, 도리어 미간의 주름을 꾹꾹 눌러 펴는 손가락이었다. 주름 좀 펴. 아주 조금은, 친절하게 들리는 목소리.
“대학엔 안 가.”
“그럼 바로 입단을 하는……!”
“아니. 입단도 안 해. 적어도 여기선 안 할걸.”
그럼…….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한 번에 찾아내기 어려운 단서가 그 자리에 숨어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리그에 참가할 생각도, 바로 구단에 입단할 생각도 아니라면 무얼 한다는 것일까. 그가 배구를 그만둘 리는 없는데. 그거 하나는 맞췄지만, 다시 말해 그거 하나 맞췄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순 없었다. 그럼……? 갑작스러운 스무고개에 진지하게 머리를 숙여가면서까지 골몰했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구경했다 싶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주고 싶지 않다는 심보에서인지 오이카와는 정답을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벌떡 들어 올렸다.
“나 해외 가. 아르헨티나. 졸업하고 얼마 안 있어서 바로 출국해.”
“예? 왜요?”
“왜는 무슨 왜야. 내가 그거까지 토비오에게 미주알고주알 읊어줘야 해? 참고로 배구하러 가는 거니까 배구는요? 이딴 소리 하기만 해봐.”
그 말에 정확히 같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무는 카게야마를 눈치채고 그를 째려본 오이카와였지만, 그럼에도 얼마 안 가 한숨을 푹 쉬며 아주 조금 부연을 더 했다. 사사하고 싶은 감독님이 거기 계셔서 그래. 사사요……? 가르침을 받고 싶은 감독님이 거기 있다고! 아. 그렇군요. 그래. 그렇군요……. 말끝을 흐리는 까닭을, 그해 가을이라면 저도 알지 못해 자신을 궁금해했겠으나 겨울에 이르렀을 때는 조금, 무엇 때문인지 조금은 분명히 알게 된 카게야마였다. 중학교 시절에 첫 번째 접점이 지나가고 서로를 대적한 고등학교 시절의 두 번째 접점이 슬슬 마무리되려 하고 있었다. 이 뒤론 또다시 각자 자신의 궤도를 달리며 멀어질 것이다. 세 번째 접점은,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놓치진 않을까? 이제는 다시 만난다는 것이 그저 지금처럼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만나길 바라는 건 기회였다. 놓치지 않길 바라는 것 역시 앞선 것과 같았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기회냐면, 그러니까.
“왜 그런 표정이야? 그러는 토비오 너도 우카이 감독님께 배우고 싶어서 카라스노로 대뜸 진학한 거잖아. 나는 뭐 그러면 안 된다는 이유라도 있나?”
그런 건 없었다. 애초에 자기 뜻을 관철하는 데 이골이 난 그를 붙잡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인생에 몇 되지 않았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카게야마도 이미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정도로 그에게 관여할 자격을 갖지 못했다.
“그럼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이카와에겐 없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저한테는요.”
나한테.
“토비오쨩에게 무슨 문제?”
이때쯤 토비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 그러니까 말야, 사실 당신은 이미 알지 않을까? 나보다 눈치도 빠르고 셈도 빠른 당신이라면 이미 눈치채고도 남지 않았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는 것은 그저 나를 놀리고 골리고 나로 장난을 치기 위함이 아닐까? 그 가정으로 조금 더 솔직한 마음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은 고백을 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껏 단어를 모아 문장으로 정제한 고백이 입 밖으로 나오는 날은 오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투박한, 그렇기에 카게야마와 잘 어울릴지도 모르는, 단순한 문장 하나가 다였다.
“제가 오이카와 씨를 좋아하니까요.”
표현하지 못한 마음조차 당신은 알까? 당신과 나의 궤도가 조금 더 겹치는 모습을 상상하고, 비록 당신은 당신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나와는 비슷하면서도 결국 같지 않을 중심을 품지만 그럼에도 조금 더, 조금 더 우리 사이에 접점이 있기를 바란 것을 당신은 아는가? 서로를 끌어내고 불러낼 수 있기를. 원하는 대로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바랐지만.
“뭐?”
그의 반응을 본 순간 카게야마는 체념 외에 다른 선택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았다. 당황하는 그의 눈에 제 표정이 어떻게 비쳤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적어도 저는 제 눈에 비친 그의 표정을 보았으니까. 먼저 가보겠습니다. 응원하겠다는 말을 빠뜨렸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몸을 돌린 뒤였다. 야, 잠깐만! 토비오! 토비오. 이름. 당신이 부르는 내 이름.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순간 그가 다시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어린 시절, 끝까지 서브는 가르쳐주지 않겠다며 저를 골리기만 했지만 실연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저를 따라오는 그를 앞질러 지나가며 부러 다른 것은 눈에 담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며 갖은 애를 다 썼다. 전방주시에 소홀하고 만 건 그 탓인지도 몰랐다. 아닌가? 그래도 신호등은 녹색이었는데. 갑작스레 그의 눈에 들어차는 광원은 흰빛, 그리고 노란빛이었다. 주의했다고 해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주 빠르게 전환되는 사고, 그에 반해 느리게 포착되는 시야. 감각.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어깨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밀쳐내는 손이. 떨쳐내는 팔이. 내게 화를 내는 당신의 얼굴이.
어쩐지 우리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잠깐이나마 함께했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지만…….
이번엔 오이카와의 팔을 붙잡아 멈출 사람이 없어 결국 카게야마는 그대로 맞고 밀쳐져 넘어져 굴렀다. 그러면서 신호등인지 전봇대인지, 아무튼 쇠기둥 같은 것에 팔이 부딪쳤고, 아팠고, 눈을 깜박였고, 굉음이.
쾅!
선을 내려다보던 부심이 팔을 크게 휘둘러 멀리서도 볼 수 있게끔 동작이 큰 수신호를 전했다. 인! 선언과 함께 동료들이 기운찬 함성을 내지른다. 나이스 서브! 손도 내밀지 못하고 자기들 사이를 아슬아슬 빠져나가 선 가까이에 내리꽂힌 공으로 인해 상대편 코트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가도 별수 없었다. 득점했으므로 서브권은 여전히 카라스노 쪽에 있었다. 카게야마의 차례가 계속되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다시 한번 퉁, 높이 솟아오르는 공. 두 번째 서브.
……두 번째 방문에도 카게야마는 그를 면회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들은 팔에 깁스를 하고 그때만 해도 낫지 않은 찰과상으로 얼굴 곳곳에 반창고를 붙인 카게야마를 친절하게 대하였으므로 악감정으로 그를 막아 세운 것은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중환자실은 면회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카게야마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능하면 계속…… 곁을 지키고 싶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이해해요. 괜찮습니다. 양보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가족에게 카게야마는 사과조차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사과하지 말렴. 너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런 다정한 말을 듣고 말아서.
세 번째 서브. 쿄타니를 노리고 던진 공이었으나 와타리가 받아내어 위로 띄웠다. 야하바! 정확히 세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공을 보며 카게야마는 혀를 찼다. 킨다이치? 아니면 다른 쪽으로? 츠키시마의 눈이 빠르게 상대 코트를 훑고 후위에선 이젠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리시브 실력을 갖춘 히나타가 공격에 대비하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타닥, 그런 소리를 내며 공이 꺾였다.
“아.”
“이런.”
“맙소사.”
순서대로 스가와라, 사와무라, 마츠카와가 입을 벌리고, 아이고, 아이고! 제 이마를 내리친 하나마키가 더는 못 보겠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를 대신하듯 눈을 돌리지 않은 사와무라의 시선이 주심에게로 향했다. 스가와라와 마츠카와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눈동자를 굴리는 것뿐인데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라 이리하타 감독 쪽으로는 차마 눈을 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호루라기를 불진 않았으니 조금 불안정했다 치고 라스트만 잘 이어서 네트 너머로 넘기기만 한다면……. 희망을 잃기엔 아직 이르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삐이익!
주심의 손이 가차 없이 허공을 가르자 점수판 앞에 선 학생들이 카라스노의 숫자판을 넘겼다. 25. 또 한 세트가 끝났다. 한 경기가 끝났다.
야하바의 멱살을 잡아쥐려는 쿄타니 앞을 킨다이치가 아슬아슬하게 막아 세우다 그 서슬에 밀려 넘어지는 소동이 한바탕 벌어진 후 양측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협의하였다. 미안합니다. 아직도 이렇게까지…… 감을 잡지 못할 줄이야. 미조구치가 세 사람을 갈라놓으며 다툼을 진압하는 사이 우카이와 타케다 앞에 선 이리하타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애들을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 말에 황급히 손을 젓고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두 사람의 얼굴도 밝을 수는 없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아직 아이들이니까요. 어른들의 마음을 앞세워 닦아세울 수도 없고, 왜인지 알면서 왜 일어서지 못하는 거냐고 재촉하여 나무라기도 애매하였다. 그래도 간신히, 잠시간 휴식의 긍정적인 요소를 하나만이라도 꼽아보자면 선배들이 그제야 후배들과 제대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되었다. 카라스노에선 안 그래도 그들에게 달려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아이들이 일제히 사와무라와 스가와라에게 달려들고 안겨들어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세이죠는 그보단 조금 더 차분한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인사를 나눈 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야하바와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들이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그들이 세이죠로 찾아갔을 때 보았던 자기들끼리의 연습 경기에선 다소 긴장한 면모는 있어도 이렇게까지 엉망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른들의 생각과 달리 야하바의 불안은 3월 현 대회에서부터 비롯되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어떻게 된 건…… 없는데요. 그 말을 우리가 믿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하나마키가 단박에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야하바의 실력을 잘 알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반복할 실력으로 세이죠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뭐가 불안한 거야? 조금 따지듯이 튀어나온 것 같아 입을 꾹 다문 후 정정해서 다시 물었다. 너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뭐야. 말해줄 수 있어? 원인……. 그 말에 야하바는 바닥을 내려다보다 이내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들었다. 눈 안엔 여전히 불안이 담겨 있어 밀려오는 파도처럼 출렁였지만, 꿋꿋이 참아낼 작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기우라는 그의 말은 어디까지나 기우로 끝나야 할 것이다. 무너지는 하늘을 어떻게 받아낼지 침식까지 잊어가며 고민해서 나아질 상황이라면 그리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잊어버리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다. 이는 카게야마의 생각이니, 그렇다고 그가 그들의 대화를 모두 엿들은 것은 아니었다. 카게야마의 위치에선 입 모양도 보이지 않을 위치에서 대화를 나눈 그들이었다. 부러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카게야마는 그들이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도 끝나기 직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공을 가지러 근처로 의도치 않게 다가갔을 때 건진 단어가 딱 기우, 그 두 글자였다. 그건 야하바의 입에서 처음 나온 단어였으나 이윽고 마츠카와의 입에서도 반복되었다. 맞아. 기우네. 그러네. 하나마키가 동조하는 것으로 갈무리되는 것으로 보이는 대화였다. 휴식도 슬슬 끝나가고 있었고,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다고 자신을 다잡는 야하바를 보면 오늘 카라스노가 세이죠를 상대로 완승을 하는 것은 역시 힘들겠다는 판단을 세우는 카게야마였다. 조금 전 마지막 세트는 야하바의 실책이 크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카라스노가 따낸 세트 중 세이죠를 쉽게 꺾어 눌러 얻은 세트는 없었다. 조금 많이 흔들릴지라도, 불안정할지라도 제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돌아갈 기미를 보이는 것은 본디 그들의 기반이 이를 가능하게 할 만큼 탄탄하고 안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흔들려도 여기까지리라. 불안할지라도 여기까지. 끝까지 방심해선 안 되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정작 그렇게 다짐해놓고 그 말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마는 것은 결국 자신인가?
“이와이즈미 선배에겐 연락이 없나요?”
다시 네트 위를 넘어 다니는 공. 배구에 전념할 때만큼은 말 그대로 오직 그 한 가지에만 마음을 쓰고 열중하여 다른 모든 상념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채널에 노이즈가 끼듯 말끔하고 깔끔해야 할 그의 배구를 외란이 침범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실수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랠리가 끝난 후 후위로 물러서는 카게야마를 히나타가 붙잡았다. 히나타의 눈마저 속일 수야 없었다.
“너 자꾸 딴생각하지. 집중 안 해?”
아마도 히나타는 그 말에 카게야마가 집중? 내가 배구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고? 그런 말을 하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을 예상한 듯하였다. 그 뒤 스스로 그 사실을 자각하고 부정할 수 없어 반성하고 개선하는 전개까지 바랐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게야마가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히나타에게 더 큰 미지의 공포로 다가와 버렸다. 뭐, 진짜……? 저 녀석이 배구에 집중을 안 한다고? 그걸 인정했다고? 타나카까지 기겁하며 물러서는 가운데 그를 제치고 카게야마에게 다가온 건 엔노시타였다.
“카게야마. 괜찮아?”
그 순간 카게야마는 괜찮지 않다고 대답할 뻔한 자신을 왜 막아 세운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현기증을 느꼈고, 아득한 정신을 간신히 다잡아 중심을 지켰다. 그게.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감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게. 그게 카게야마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처럼 다른 단어가 발음되는 것을 막는 듯도 하였다. 마치 야하바가 마츠카와와 하나마키 앞에서도 원인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던 것처럼, 카게야마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이상할 건 없다고 했지. 이상한 건, 이상이 발생한 건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다. 동시에 그것을 감지한 엔노시타가 한 손으론 카게야마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타케다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심과 세이죠 측에 양해를 구하고 코트로 뛰어들었다. 그때쯤 그곳의 누구에게도 가볍게 장난을 계속할 의향은 남아있지 않으니. 카게야마. 너 지금 식은땀 엄청 흘리고 있어. 괜찮아? 팔이 아픈 거야? 아니면 다리? 굳이 고르자면 머리겠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잠깐……. 잠깐만요. 멀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속이 체한 것처럼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간신히 ‘그게’ 말고도 다른 문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카게야마는 저를 부축하여 코트 밖으로 이끌려는 손을 거절했다. 이상이 발생한 건 어디지? 평소라면 모를 리 없는데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모든 것이 잘못된 기분이라서? 뒤틀린 것 같은 기분이라서? 가까스로 입 밖으로 저를 옭매는 단어를 하나 더 내뱉을 수 있었다. 어깨.
“어깨 놔 주세요. 엔노시타 선배.”
“아. 응. 미안.”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과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러나 머리가 어지러워 그 이상의 말을, 그렇게나 긴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다른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가능하지 않을 만큼 예민해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했다. 네트 너머로 킨다이치가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보고 있었다. 코트 너머로는 쿠니미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카게야마는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에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 더 너머에 서 있는, 불안감을 씻으려는 듯 대화 주제를 바꾸는 듯한 세이죠 OB 둘의 대화까지 카게야마는 엿들을 수 있었다. 아닌가. 불안감을 씻기 위해 부러 화제를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근원으로, 중심으로 발을 디딘 건지도 모르겠다. 이와이즈미가 좀 늦네. 늦게 온다고는 했지만. 그리고. 그게 신호처럼. 신호탄처럼.
쾅! 터져나가는 굉음은 이제 없었다. 아무 데도 없었다.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닫아두었던 체육관 문이 느리게 열리는 순간에 저를 따라 카라스노의 선수들, 세이죠의 선수들, 비교적 문과 가까이 있던 후보 선수들의 시선이 모두 모였다. 그 순간 카게야마는 제가 기대하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이뤄지지 않을 기대였다. 그 순간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재생되는 그날의 독백에 덧붙는 해설이 쐐기를 박듯이. 나는 당신과 나의 궤도가 좀 더 겹치기를 원하였지만 실은 그래선 안 되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나는 나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게 두었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결국 같지 않을 각자의 중심을 품고 각자의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바람대로 가까이 있기만을 바란다면, 그리하여 당신을 고정해야 할 당신의 중심이 당신을 놓친다면 결과는 분명하기 때문에. 결과는 분명히 그리할 것이기 때문에.
“아, 왔어?”
“이와이즈미. 지금 상황이…….”
“…….”
“어?”
이와이즈미는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화면엔 여전히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아마 오는 길에, 그것도 직전에 전화를 받고 통화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육관에 도착하여 문을 연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저에게 다가붙는 그 어떤 자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야하바보다도, 카게야마보다도 더 정신을 어딘가 먼 곳에 빠뜨리고 온 것처럼 보였으며,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카게야마가 중학 시절부터 보아온 그의 모습 중 이런 모습을 보이는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는 언제나 단단히, 중심이 되어 서 있어 무너지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고 아마 한 번도 무너진 적 없지 않을까 같은 추측까지 가능하게 하였는데, 겨우, 그의 중얼거림이 카게야마의 귀에도 닿을 만큼의 음량을 확보한 순간 무위로 돌아가는 모든 시간이었다.
“갔어…….”
결과는 분명히, 당신의 궤도를 그리는 중심보다 웃도는 인력이 초래한 결과대로…….
“떠났어…….”
그의 손에 있던 휴대전화는 어느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액정에는 금이 갔고, 불이 꺼진 화면은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야 기기의 생존 여부를 확인해줄 것이다. 카게야마는 결국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던 것 같다. 여파가 저에게까지 미치지 않을 여부가 없었다. 저를 붙잡아주는 팔에 힘입어 겨우 선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면 동그랗게, 점점이 박히는 물 자국들. 제 자리를 이탈하여 아래로, 아래에 몸을 누이는 모든 것들.
떨어진다.
앞으로 영원토록 제게 없을 단어를 끝으로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