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는 봉투 안에 당신을 고발하는 글을 적어 넣었다
- gwachaeso
- 3월 20일
- 3분 분량
<회색도시>
누구도 아닌 남자가 고소장 보내는 이야기. 팬아트
그러므로 그는 봉투 안에 당신을 고발하는 글을 적어 넣었다.
꼬깃꼬깃 접은 종이는 가로로 두 번 접히고도 봉투 안에 들어가기엔 큰 감이 있어 세로로도 한 번 더 접어 목을 꺾어야 했다. 품에 봉투를 미리 넣고 온 그는 상주와 어린 상주를 도우러 온 이들이 경황없는 틈을 노렸고, 기회를 엿보다 때마침 귀가하는 무리들 사이로 몸을 비져 넣었다. 빈소에 들리지 않고도 안으로 발을 들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예의 없는 청년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모호했다. 부조를 받는 젊은 청년이 그들에게 인사하러 나온 사이 재빨리 품의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그제야 후련하다는 듯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 앞에는 곧 육개장과 수육으로 이뤄진 상이 차려졌다. 그는 제법 시장했기에 곧장 수저를 들었다.
그에게도 상갓집 부조를 식대로 표현하는 것은 경악할 소리라는 자각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말은 삼갔지만, 부조 한 푼 보태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도 그 생각에는 예의 바른 행동 같지 않아 들키지 않게 봉투를 내려놓을 순간을 오랫동안 노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들어오면 그 뒤는 제법 마음이 편한 편이었다. 육개장은 한꺼번에 끌여 놓기 때문에 개당 돈을 받는 음료수와 달리 몇 그릇을 먹든 큰 차이가 없다는 소리를 언뜻 들은 바 있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제 뱃속에 걸신이 들어앉아 있다고 하면 그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 이게 누구야? 귀한 몸 오셨네.”
‘아이 씨,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그 앞에 아무도 앉지 않은 건 겸상을 해야 할 만큼 사람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는 것은, 믿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는 당신이 따르는 잔을 가만히 볼 뿐 받지는 아니했다. 그러므로 잔은 채워질 뿐 비워지지 않았다.
“아까는 혜연이가 와서는 네가 준 봉투가 제일 두껍다고 진짜 뭐하는 사이냐고 묻더라.”
그러나 봉투는 그새 비워진 모양이었다. 그는 사실 조금 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봉투를 내려놓는 데 실패했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던 상주의 동그란 눈을, 붉게 짓무른 눈가를 기억했다. 상주는 그가 상 위에 올려둔 봉투를 두 손으로 잡고는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겨달라고 붙잡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능한 한 몰래 두고 가려 했다는 사실을 들켰지만, 들리는 말로는 고인이 생전에 베푼 선행이 많아 슬그머니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모양이었다. 한 마디로 괜히 기회를 노리고 시간을 때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래도 빈소를 방문하는 사람이 많아 그건 또 다행이었다. 당신은 좋은 경찰이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다.
‘기대하면 안 되는데.’
그리고 그는 그런 당신을 고발하는 글을 적어 넣었다.
“이야, ■■■이, 이젠 합법적인 방법으로 항의할 줄도 알고.”
당신이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생명을 빼앗지 않아도, 불을 지르지 않아도, 겁을 주며 으르지 않아도, 떄리고 다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당신이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당신 덕분에 그는 비교적 온건하게 제 의견을 주장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어떤 삶에서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누군가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쉬운 사실도 알기 어렵다. 그걸 알고 있는 당신 덕분에 그는 오늘날 당신을 고발하는 글을 몇 자 적어내린 봉투를 당신의 아이에게 건네고 돌아왔다.
빈 종이였다. 그는 아무 말도 적지 못했다.
원망하는 마음이 커 무엇이든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그 ‘원망’의 철자가 무엇이었는지 잊을 정도로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고발하였나, 하면 봉투 위에 적힌 글자가 되겠다. 양품점 문구점에서 판매되는 기성품에 프린팅 되어 적힌 한 문장이 이리 떠난 당신을 고발하고 당신의 죽음을 고발했다. 그는 그 외에 당신을 고발할 적절할 말을 더 찾지 못했다. 흰 봉투 위에 검게 뚝뚝 떨어지는 굵은 획의 글씨가 표하는 조의는 곧 제목이고 내용이고 전부를 표했다. 그래서 그는 제 글씨로는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얼굴을 바꾸고 목소리를 바꿔도 펜 잡는 손의 자세까지 바꿔치우기엔 아직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기성이면 어떤가. 기성 세대의 죽음, 당신이 그 시작이 될 것을 당신은 모르고 그 역시 두 눈으로 보려면 아직 먼 것을.
육개장은 그럭저럭 맛있었다. 장르적 문법에 따르면 그는 곧 사라져야 할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지면 권혜연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뒤늦게 도착한 주정재에게 제가 받은 이상한 봉투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주정재는 어떤 자식이 여까지 와서 장난질이야? 하고 화를 낼 것이고, 권혜연은, 그래도 화를 내진 않을 것 같았다.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했다. 그는 자리를 떠났고, 내내 좌식 탁자 앞에 마주 앉아 그에게 말을 걸던 당신의 허깨비도 사라졌다.
그는 내가 아니니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