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 gwachaeso
- 3월 18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9일
드라마 <괴물>
미완
총성이 두 번 울리매 모든 것이 끝났다. 우리 사이에 나라는 엿새의 침묵과 일곱째 날의 양각 나팔 없이도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져 사라졌다. 나는 성벽이 되고 싶었다. 더는 당신이 나서지 않도록 하는, 그리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막는 외벽이 되고 싶었으나 당신의 수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나는 역할을 다하지 못한 댐의 벽돌 한 장 그 이상은 될 수 없던 모양이다.
당신이 쏜 두 발의 흉탄은 각각 나의 머리와 심장에 명중하니 당신의 살의가 내 머리를 꿰뚫고 당신의 실의가 내 가슴을 관통한다. 지옥에 떨어진 당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죽으니 나를 죽인 건 당신이다.
모월 모일 박정제는 이동식을 찾아갔다.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항소를 포기했기에 그의 어미보다 일찍 형이 확정되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1심에서 선고받은 형이 어머니 도해원 전 문주시의원보다 적었기 때문에 도해원의 형이 극적으로 감형되지 않는 이상 집에 먼저 돌아오는 건 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40여 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니의 품이자 그늘에서 오롯이 벗어난 적 없었던 그는 난생처음으로 세상에 혼자 가림막 없이 땅 위에 놓였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햇빛은 그의 정수리를 새가 부리 쪼듯 쪼는 듯했다. 이젠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빈집이든 어디든 돌아가긴 해야 할 텐데, 차가 없어 걸어서 가야 하기에 여정을 감당할 신발 밑창이 충분히 튼튼한가 확인하는 중에 누가 멀리서 경적을 울려 고개를 들었다. 오지화였다. 박정제는 다시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집 앞에 내려 줄게. 그 말이 처음이자 끝, 오지화는 그 뒤로 말없이 조용히 운전만 했다. 그는 박정제도 그럴 것으로 기대한 듯했으니, 박정제는 그의 기대를 어그러뜨리는 자신의 행동이 유감스러웠다.
“나, 동식이 만나러 가려고.”
“네가 왜.”
“물어볼 게 있어서.”
“중요한 거야?”
“응.”
이동식이 만나주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본인도 그와 똑같이 지난 3년 동안 어머니의 비서와의 면회를 거절해 왔으니 모를 수가 없다. 오지화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다가, 백미러에 비치는 박정제를 외면하고 입을 열었다. 박정제. 잘 들어. 이동식이 뭐라고 하든……. 박정제가 오지화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귀담아들을 더 중요한 말이 있음을 알기에 그에게 그의 말 대로 하겠다는 거짓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지화야, 난 동식이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 말에 오지화는 입을 다물었다. 최초에 그가 바란 침묵이 창 하나 열지 않아 답답한 차내를 가득 메웠다.
“왜 아직 살아 있어?”
상대가 박정제라고 해서 폭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3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들은 이동식의 무심한 목소리에 박정제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었기에 이제야 듣게 된 것에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상대를 탓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지, 동식아.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 넌 여전히 내게 과분할 만큼 좋은 사람이구나. 그들이 마주 앉아 5분이 흘렀을 때였다. 5분 동안 그들은 침묵했고, 5분 만에 들은 말이 저것이었다. 더 미룰 것이 없어진 박정제는 일어날 채비를 했다. 이동식의 말에 반응한 박정제의 행동에 이동식이 반응했다.
“가려고?”
“응, 동식아.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너 여기 뭣 하러 왔냐.”
“물어볼 게 있어서. 괜찮아. 답을 들었으니까.”
“나한테서?”
“너한테서.”
사실 답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데 조금 헷갈려서 그랬어. 확신이 없어서. 그치만 괜찮아. 이젠 안 헷갈리니까. 확실해. 네가 답을 줬잖아. 박정제는 여전히 정돈된 말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하긴 똑 부러지게 말을 못 한다고 어머니께 꾸중 듣던 어린 날의 자신이 어디 가겠는가. 이동식은 고개를 반쯤 돌리고 혀를 찼다.
“앉아.”
박정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에 따랐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 이동식이 서서 들으라고 하면 박정제는 서서 들어 마땅한 자였기 때문이나 앉으라고 했기에 박정제는 앉았다.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죄인이니 제가 겪은 3년이 일곱 번 반복하는 동안 무고한 오라비가 누이를 죽인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법 기관이 언도한 처벌은 끝났으나 박정제 내면의 죄의식이 함께 끝날 리는 만무하다. 박정제는 오늘 아니면 내일 죽기 위해 이동식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동식의 허락을 구하고자 함은 아니고, 제가 어리석어 이동식의 지시를 이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동식은 말했다. 너 혼자 죽인 것 같진 않고. 유연이 죽인 놈 잡고 그때 죽어라, 정제야. 동식아.
“유연이 죽인 놈 잡았잖아.”
한기환. 전 경찰차장.
“유연이 죽인 놈, 네가 죽였잖아.”
이젠 나 죽어도 되는 거지? 이동식의 입꼬리 끝이 비스듬히 올라간다. 이동식은 지금 수의를 입고 있다.
총성이 두 번 울린 날 한주원은 모든 것이 어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무엇을 잘못했을까. 좀 더 서둘러야 했다. 좀 더 바삐 움직여 그보다 먼저 한기환 앞에 도달해야 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여 관측하지도 못하는 어떤 가능성이 이뤄진 세상에서는 그게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했겠지. 그곳의 한주원도 제 모든 걸 던져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걸 막으려 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곳의 한주원은 무력하다. 여기 한주원은 무용했다. 한주원은 총구를 내린 등을 망연히 응시하다 언젠가 진술 녹화실에서 질식하는 그를 보고 그의 목을 조르는 손을 거칠게 잡아떼어내던 순간처럼 우악하게 어깨를 잡아 돌렸다. 이동식! 터져 나온 고함에 눈길 붉은 자가 고개를 기울인다. 이보다 더 낮게 가라앉을 수 없는 목소리의 속삭임이 이름의 뒤를 잇고, 후회는 그 뒤에 서 있다.
“당신은 더는 안 된다고 했잖아.”
이창진에게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걸 목격한 순간에 말을 하는 게 좋았을까?
“지옥엔 내가 가겠다고 했잖아.”
빗물 젖은 땅에 무릎 굽힌 날 사죄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당신을 막아 세울 수 없었던 걸까? 한주원은 울고 싶었다. 이번엔 찔찔 짠다고 놀린다고 하여도 부정하기 힘들 만큼 무너져 내리고 싶었고, 무너뜨리고 싶었다. 당신을. 지옥이 따로 있는가.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버러지보다 못한 자의 피를 묻힌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곳이 바로 나의 지옥이고, 나의 육신이 지옥에 있으니 나는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때 입을 여는 당신. 이미 지옥이었어. 한주원은 입술을 비틀어 일그러뜨렸다. 그 입 다물지 못해, 당신.
“주원이 너는 부정했지만.”
말을 마친 그는 일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한주원은 제 손에 한 움큼 묻은 피에 할 말을 잃어 주저앉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한기환이 쏜 총알은 이동식의 어깨에 박혔고, 이동식은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대신 두 번의 총성으로 응답했다. 누가 봐도 제대로 겨냥하고 쏜 게 분명하도록 머리와 심장을 명중시켰다. 변호할 여지가 없는 살인과 살해 현장에 남겨진 한주원은 망연자실하여 이동식을 체포할 겨를이 없고 따라서 대신 그를 체포할 사람이 올라왔다. 오지화, 바로 그다.
“이동식……. 그리고 한주원 경위. 당신들 이게 지금.”
이동식, 한주원, 한기환을 번갈아 바라보는 오지화는 총성을 듣는 순간 허리춤에서 꺼내어 예비한 총을 그들을 번갈아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이동식의 손이 탄 진실이 모두에게 주어진 것처럼 오지화에게도 공평하게, 가리는 것 없이 주어졌을 때, 오지화는 살아온 이래 몇 없는 후회에 오늘이 가장 크게 매겨질 것을 예지했다. 오지화는 그들의 손에 총이 없고 바닥에 두 정의 총이 모두 떨어져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부리부리한 총구를 바닥으로 내렸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진정시킨 뒤 주머니에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구속을 꺼냈다. 오지화는 입술을 짓씹으며 의무를 수행했다.
“노력할 수 있었잖아.”
조금만 더 노력할 수 있었잖아. 우리 모두를 보라고는 안 해. 유연이를 보라고도 안 해. 너를 봐서 그럴 수 있었잖아. 너를 위해 조금만 더 노력할 수 있었잖아. 지화야. 수갑을 채우는 손 위로 내려앉는 이동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 노력했다. 이창진은 안 죽였잖아.”
목은 졸랐지만 죽이진 않았다. 나는 노력했어, 지화야.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해. 그 순간 연민에 얼룩진 생각을 단호히 잘라내는 목소리가 있어 이동식은 수갑 채워진 자신의 양손에서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울음기 가신 목소리에는 슬픔을 대신하여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분노는 가시복어처럼 둥글게 부풀어 사방에 불거진 그득한 가시로 온 주위를 사정없이 긁어 대지만, 밖이 아닌 오직 안에서 아직 젊고 어린 청년의 속을 갈기갈기 찢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피 흘리게 하느라 바쁜 분노는 자책이라고도 읽는 절망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래, 절망에 빠진 한주원은 이동식을 결코 용서할 수 없고 자기 자신 또한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당신은 포기한 거야. 스스로 떨어지는 걸 선택한 거야.”
그러나 그걸 이동식이 받아줄 의무가 있는가? 하면.
“내가 처음 사람을 죽인 건 4년 전입니다. 한주원 경위.”
이동식은 오지화에게도 그날 일게 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오지화가 아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는 것과 다름없는 단편적인 정보가 전부였다. 그러니 이것은 그 역시 처음 듣는 그의 고해였다. 전부 내가 죽였어. 내가 죽인 거야.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한주원 경위, 나는 그때 떨어졌어요. 이제 와 기어오르기엔 너무 높은 거 있죠. 한주원이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어 이동식을 겨눈 건 그 말이 떨어진 순간일 것이다.
“한주원 경위. 총 내려요.”
오지화와 그를 따라 올라온 강도수가 민첩하게 총을 꺼내어 한주원을 겨눴다. 그럼에도 한주원은 총을 내릴 생각 없이, 방아쇠를 당장 당길 생각도 없이 이동식을 겨눈 채로 이동식을 노려보았다. 이동식은 총알이 발사될 총구보다 무형의 시선을 내리꽂는 두 눈이 더 매몰차고 날카로우며 두려움을 준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것도 아비라고, 비아냥거리듯 중얼대며 농을 쳤다. 아닌 거 알잖습니까, 하고 단박에 농을 멈추게 하는 입은 이제 와 무섭지 않다만. 이동식은 그의 눈이, 지옥에 떨어지겠다고 말했던 그의 눈이 무서워 끝내 시선을 낮추어 눈을 피한다.
“쏘세요.”
“이동식, 입 안 닥쳐.”
오지화는 이동식을 곁눈질하며 한주원을 경계하기 바쁘고,
“쏴.”
한주원은 총을 고쳐 잡지 않으며,
“이동식!”
이동식은 오지화가 날카롭게 소리친 순간 한주원이 내팽개치듯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다 가라앉으면 잔해밖에 남지 않은 사내가 보였다. 아, 그걸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괴물을 잡으려면 괴물이 되는 수밖에 없어서 괴물이 되고 만 이야기. 이런 결말이면 족하다. 더 나은 결말의 존재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기왕지사 이렇게 된 일 이렇게 되었으면 그만이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진심입니다.”
진심이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이 또한 정녕 진심이다.
오지화와 강도수가 이동식을 끌고 나간 뒤, 그 뒤로 한주원은 단 한 번도 그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참고인 증언을 하기 위해 증인석에 섰을 때도 그에게 똑바로 시선을 준 적이 없으니 오늘이 바로 그들이 실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날이 될 터였다.
박정제가 다녀가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동식은 한주원을 반가이 맞이하였으나 이는 오래전 그가 그의 파트너의 고발로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와 유사하면서도 또 전혀 닮지 않기도 했다. 거울상 같았다. 그날의 이동식은 고발된 죄가 없었으나 오늘날 그는 죄지은 자이며, 그날의 한주원은 오심으로 고발한 자였으나 오늘날 그는 눈앞의 남자가 살해한 자의 자식이니. 이보다 더 복잡하게 얽힐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가도, 또 이렇게 명확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계보가 없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람을 죽인 자는 언제든 죽임당할 수 있고 복수에 늦은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기환은 이유연을 죽였다. 그렇기에 이동식은 한기환을 죽였다. 그렇다면 이제 한주원은 이동식을 죽여 한기환의 복수를 해야 하는가? 재밌게도 이동식은 부자를 모두 죽였기에 이는 불가능했다. 그날 지옥에 떨어지길 허락받지 못한 자는 또 다른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옥은 사자가 가는 곳이니 한주원은 사자이고 한주원을 살해한 자는 이동식이다.
“왜 왔습니까? 내가 박정제를 만났다고 하니 부리나케 달려오셨네요. 그렇게나 내가 좋습니까?”
“자살교사죄를 더할 생각이신가 해서요.”
“죽었답니까?”
“아뇨.”
“그럼 됐네. 체포하러 오신 건 아니고 경고하러 오셨구만? 여기까지.”
겉으로 보기에 이동식은 박정제가 죽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으나 그가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과 속마음이 일치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명분도 그러하여, 어느 쪽도 진실일 가능성이 존재하고 거짓일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박정제가 죽든 말든 이제 그와는 정말로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런 태도를 취할 뿐이지 정말로 그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할 정도로 박정제의 처지가 기저에 처박힌 건 아닐지도 모른다. 둘 중 어느 쪽이냐고, 아니면 어느 쪽에 가깝냐고 캐묻는 것은 제삼자의 몫이 아니고 실은 누구의 몫도 아니니, 다시 말해 이동식 자신의 몫도 아니었다. 누구도 이동식에게 그를 생각하라고, 또는 생각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처지를 헤아리는 측면에서의 생각이든, 단순히 그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생각이든 간에 이동식 자신조차 자기 자신에게 결정을 내리길 강요하지 않는다. 뭐 하러 그리 해야 한단 말인가. 구태여 그를 생각할 필요도, 생각하지 않을 오기도, 자신에게 제약을 걸어야 할 의무도 없다. 제약은 육신에 걸린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스스로 목에 찬 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