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부음을 받은 사람들
- gwachaeso
- 4월 7일
- 24분 분량
<HQ!!>
아츠카게 오이이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로드 트립
날조 전개 주의
1. 동행
문명이란 무엇인가 같은 고민을 한가로이 할 정도로 모든 이에게 여유가 주어지진 않았다. 사유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정체하거나 퇴보할 뿐이니 실은 마땅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인간은 뭐든 망치는 데 선수니까. 저와 다른 종의 생명을 망치는 자들이 저희 자신의 종이라고 보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예견된 멸망이고 멸종이었다. 그리고 문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카게야마였다. 다만 생각하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사라지는 날에는 더는 그들을 관측하거나 기록하거나 기억하는 이들 역시 남아있지 않을 테니 그때가 문명의 기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도 존재를 알지 못하면 살아있지도 않은 것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인간이 문명을 망가뜨렸냐고 하면 문명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카게야마에겐 이보다 어려운 질문이 따로 없었다. 다만 끝까지 노력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면 그들이 쌓아 올리고 무너뜨린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건 결국 사람이었다. 그러자 더는 이전처럼 관리되지 못해 무너지고, 부식되고, 망가진 세상이 그들 앞에 놓였다. 사람이 억지로 생을 붙여 존속시키던 얄팍한 수명이 다한 결과였다. 손을 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꼴이 되는 걸 보면 이들을 망가뜨리는 게 이리도 쉬운 줄은 알지 못했다. 물론 이는 처음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번 쓰레기 봉지가 놓이게 된 골목처럼, 망가진 것을 아무도 고치지 않자 망가뜨리는 데도 망설이지 않게 되는 것이 사람이었다. 이것을 문명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문명인지는 몰라도, 세상을 이토록 망가뜨린 것은 분명 인간이 되겠다. 처음엔 방치하였고, 이후엔 적극적으로 세상을 파괴하는 간악한 종이 여기 있다. 실은 오래전부터 그리해왔다. 지금 이 상황은 오래전부터 그리해온 이들이 그리해오면서까지 사수하던 그들만의 터전까지 망가뜨렸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뿐이다. 최초에 문명이 꽃피던 곳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곳에도 여전히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에게서 무언가 새로이 탄생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꼬박 10년이 지난 후에야 두 번 다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늦었다면야 많이 늦은 생각을 하게 된 카게야마는 D시에서 출발했다. S시에 거주한 적도, 잠시나마 O시에 머무른 적도 있으나 마지막엔 D시에 있었던 카게야마의 가족은 그곳에 없었다. 복구되지 않는 통신선으로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을 때는 S시에 있다고 했는데, S시와 D시의 통신이 연결되었을 때는 벌써 수개월 전이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고, 여기서 무슨 일이란 최악의 경우 시에 있는 모든 구성원의 전멸을 의미했다. O시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O시의 최악의 시나리오 역시 S시와 더불어 건재했다. 그리고 S시와 O시 두 곳의 상황이 최악이 아닌 이상 그들도 D시에 관해서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를, 통신이 연결되어도 그들이 모두 죽어 받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연결이 불완전해서 그런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상황을 알리러 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시외에서의 생존율이 절반 이하임을 알면서도 기어이 입 밖으로 내고 마는 목소리는 이기적이라고 보기엔 정말 그 외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가야 한다. 그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고, 손을 들었다.
카게야마는 자원했다.
카게야마로 말할 것 같으면 한때 그는 뛰어난 배구 선수로 국가를 대표하기도 하였으나 그 국가마저 모조리 무너져 주춧돌 위에 살아가는 이 상황에 이르러서 운동선수란 한때나마 신체 튼튼하고 건강했다는 보증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여전히 튼튼하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었고, 험한 길을 떠나는 데 제격이었으니 자원한 즉시 발탁되어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홀로. 인력을 낭비할 순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뛰어난 자원 중 하나였고 카게야마는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면서 저 너머에 땅이 있는지 알아보라며 떠나보낸 비둘기와 같았다. 오래전 그의 모교의 별명은 까마귀였기 때문에 비둘기라면 까만 비둘기가 낫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반추해보면 자신이 잠시 기절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카게야마였다. 왜 기절해 있었지? 몸을 살짝 일으키니 저는 이제는 고철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차의 문짝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반대쪽 차 문이 탄흔으로 걸레짝이 되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넘겨볼 수 있었다. 그제야 기억해내는 기억이다. 다행히 정신없는 기억에서 빠져나오면서도 제 몸엔 어디 하나 구멍 난 곳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배낭을 다시 고쳐 메고 발을 떼었다. 갈 길이 멀었다.
D시에서 목적지 O시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다. 안 그래도 먼 거리를 무법자들을 피해 가려면 길을 더 돌아야만 해서 번거롭고 성가시기 짝이 없는 여로였다. 그렇다고 목숨이 한 개인 이상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카게야마 스스로 계산한 자기 신체 능력이 그들의 총탄을 하나도 빠짐없이 피할 수 있을 만큼 민첩하진 못했으니 방도도 달리 없었다. 부서진 아스팔트 포장 도로를 걸으며 카게야마는 어느새 탁 트인 곳을 안심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거기에 높은 건물이 하나라도 있으면 저격수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은폐물이 많은 곳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 외에 무엇이 몸을 숨기고 있는지 아는 것은 도통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 총격전에서 몸을 숨기는 덴 간신히 성공했지만 총알 하나가 배낭의, 그것도 물통을 꿰뚫었을 줄은 알지 못한 카게야마였다. 해는 높았고 주변에 물을 얻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탈진이 가까웠다. 결론을 내리고 차 아래, 그늘로 기어들어 간 그는 해가 숨을 때까지 기력이라도 회복해야겠다며 눈을 감았다. 밤이 되면 더욱 움직이기 힘들 테니 오늘 이동은 여기서 끝이라고 봐도 되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면 피로는 자장가였다. 죽음과 같은 수마가 몰려들었다.
새벽녘에, 주변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눈을 뜬 그는 차 아래에서 기어나와 주변을 살폈다. 그때, 툭. 데구루루. 제 발치로 다가온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섰는데,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대며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홱 고개를 돌려 상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고 다시 발치로 시선을 돌리면 뚜껑을 따지 않은 생수 페트병이 돌부리에 걸려 멈추어 있었다. 밤사이 가신 줄 안 갈증이 실은 공포에 잠시 잊혔음을 알리며 한시라도 빨리 갈라진 몸속을 물로 축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확실히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서라면 일단 뭐라도 마시긴 해야 했다. 닷새째 그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아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물로 축인 뒤, 이제는 소리야 키득대는 정도로 죽였지만 여전히 웃음을 그치지 못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 씨.”
“카메라가 있어야 했는데.”
생수병 보고 화들짝 놀라는 토비오쨩. 딱 찍어서 남기면 두고두고 보면서 웃기 좋았을 텐데 말이야. 제 표정이 그렇게나 우스웠는지 알 도리가 없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그를 더욱 유쾌하게 만든 것 같지만, 10년 전에도 그랬고 그보다 더 전에도 그랬듯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불쾌하게 만드는 데도 국가 대표만 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오셨어요?”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주지 말 걸 그랬어.”
누가 누굴 따라와? 카게야마는 툴툴거리는 그를 보며 손에 쥔 물병을 놓치지 않도록 힘주어 움켜쥐었다. 헛것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네. 그러나 헛것이 실물을 건들지는 못할 것이고, 손에 쥔 페트병과 페트병에 담겨 제 목을 축인 물은 분명 실물이었다. 기껏 새로 얻은 물병을 놓치지 않도록 다시 가방에 집어넣은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마지막으로 만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출발지와 같은 D시에 있었다. 돌아 돌아 온 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걸어서 하루는 꼬박 걸릴 이곳까지 와서 만날 얼굴은 아니긴 했다. 저는 O시로 가는데요. 오이카와 씨. 알아. S시가 아니고요. 그것도 알아. S시는 오이카와의 고향이기에 말해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카게야마의 고향과도 가까웠다. 그러나 정작 카게야마는 O시행을 자원했고, S시와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런데 절 따라온 건 아니라고 하셨고. 헛소리도 한 번 들을 때야 유쾌하지 두 번부턴 재미없거든? 그 한 번도 유쾌하게 받아준 적 없지 않냐는 생각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낸 것은 위 같은 사실들로 추론해낸 사실이다.
“이와이즈미 씨가 O시에 있나요?”
오이카와는 그 말에 카게야마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서가던 발을 늦추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아니, 마지막은 틀렸다.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늘 그랬듯이 그럴 줄 알았는데, 조금 많이 뜸을 들인 그가 대답했기 때문이다. 맞아. 그렇군요. 카게야마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좀 더 속력을 내고 보폭을 늘렸다. 그들은 한동안 나란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한참 후에야 카게야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본디 자신을 수다스러운 성격은 못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카게야마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먼저 그에게 다가와 말을 붙이는 이유는 오래전 그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배구를 해온 그의 서브 실력을 흠모하여 가르쳐달라고 말한 이유와 두루뭉술하게나마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다른 것은 원하는 것이 있어 말을 붙였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그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원하여 말을 거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겠다.
“저도요.”
아니면 너무 외로운 여정이지 않나. 갈 길이 이토록 먼데 말이다. 그러나 안전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도 없는 것이 옳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끔은 세상에 저 혼자 남는 기분을 오래 견디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그에게도 일었다. 무덤덤하지만 무정하진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 견딜 수는 있지만 영원히 견딜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렇기에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길을 떠나는 것에 자원한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때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은 눈앞의 사람이었으나 카게야마는 그 사실까지는 입 밖에 내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나이를 먹으니 그 역시 달라지는 면이 생겼다. 물론, 나이를 먹어도 달라지지 않는 면을 부정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미야 씨가 O시에 있어서요.”
“흐음.”
목적지가 같으니 동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카게야마로선 동행인이 생긴 것을 반기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비록 여전히 저에게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선배일지라도 카게야마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헛것이어도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을 상황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 역시 목구멍 뒤로 넘기어 침묵하는 그였다. 대신 다른 말을 하기로 한다. 이제 다리는 좀 괜찮으세요. 음, 멀쩡하네. 평생 이대로만 가면 좋겠다. 근데 길은 아세요? 토비오쨩, 설마 지도 없어!? 아니, 있긴 한데요. 시답잖은 수다를 나누며 발을 옮기기로 한다.
2. 유실
D시와 O시의 통신이 끊긴 직후 D시에 도착한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는 카게야마와 아는 사이였고 이름은 히나타 쇼요였다. 직후였으므로 O시에서 출발한 그는 제가 떠나온 도시와 이곳이 더는 연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고, 당황했으나 그렇다고 O시로 돌아가지는 아니하였다. 그의 여정에서 D시는 S시로 가는 길 중간에 놓인 경유지였다. 오랫동안 O시에서 살아왔으나 그곳이 고향은 아닌 그는 세상이 이리 급변하기 전에도 서서히 의미가 퇴색하던 현대의 고향에 향수나 미련이 있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곳엔 가족이 있었고, 떠나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그가 O시와 D시에서는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먼 땅에서도 곧잘 친구를 사귀던 그였고, 다만 이제 와 그곳의 소식이 이곳까지 이르기는 극도로 어려워졌을 따름이다. D시에 머물 적 히나타는 물자를 보충하는 한편 D시의 지인들과의 교류도 잊지 않았는데, 덕분에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S시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들을 수 있었고 여전히 S시에 머물고 있었던 그의 동생이 그에게 전언을 보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동생이 타지의 오라비를 찾았는지에 관해선 먼저 말하지 않았으므로 먼저 묻지도 않았다. 오누이 사이에선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오누이 간에도 정확한 이유는 오가지 않았을 수 있었다. 다만 히나타가 S시로 돌아가기로 한 것만이 사연의 결과였을 뿐이다. 다른 사람은 이를 겸하여 O시의 소식을 전해준 것에 고마워하기만 하면 되었다. 캐묻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예의가 아니었다.
카게야마가 미야 아츠무가 O시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된 건 히나타 덕택이었다. 그의 고향이 이곳보단 그곳에 더 가까웠으므로 대도시로 몰리게 된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기도 했으나, 나날이 달라지는 상황에서 어떤 사실은 급변하기도 했고 생전 달라지지 않을 줄 알았던 사실이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변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위치도 이와 마찬가지니 이 같은 정보의 유통 기한은 유독 짧았다. 히나타는 미야가 적어도 당분간은 O시를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카게야마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영원히 떠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동시에 어쩌면 그 땅을 영원히 떠날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 사유를 묻지 않고는 이유를 도통 짐작하거나 가늠하기 어려웠다. 히나타가 적잖은 시간 동안 말을 골랐으므로 카게야마는 그만큼 준비를 마친 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야가 두고 떠나기 어려운 사람이 O시에 묻혔다는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고 또 적절했을지 카게야마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납득했고, 그렇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히나타가 전하는 것에 희소식만 있을 리는 만무했다. S시로 출발하는 그에게 실어 보내는 소식이 그러한 것처럼, 묵묵히 짊어 멘 배낭 안엔 전달 사항을 적은 작은 수첩보다 더 많은 무게가 실린다.
“넌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카게야마.”
그러진 않을 것 같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지에 관해선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히나타가 거기까진 묻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O시보다 먼저 통신이 끊어진 건 S시였으므로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혹 제 가족이 S시에 있다면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할 것도 없는 짧은 부탁을 굳이 노트에 적어 기록하는 까닭은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나 그가 지나온 여로를 반대로 되짚어가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본디 사람이 발 디딜 길은 굉장히 좁은 차로엔 더는 차가 다니지 않아 도로를 걷는 사람밖에 없었고 카게야마가 이에 해당하였다. 갓길에서 발견한 어떤 이의 배낭에서 입수한 비망록을 배낭에 쑤셔 넣은 카게야마는 지금의 제 모습이 까마귀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고 다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반짝이는 물건을 좋아하여 둥지로 가져가 모은다는 까마귀와 달리 카게야마가 챙기는 것은 반짝이긴커녕 투박하고 거친 종이 묶음뿐이었다. 불을 피울 때 유용하게 쓸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녕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 한은 그러지 않을 것을 곁에 선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다행히 목적지는 같네요.”
“그래도 직접 전해주는 게 좋았을 텐데.”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으니 자원하는 소수 인력에게 그만한 기대가 얹힐 수밖에 없었다. 기록물이 필요한 까닭은 이처럼 누군가의 선의에 기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구전은 너무나 쉽게 유실되기 때문에, 길 떠나는 모든 여행자는 제게 부탁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맡기는 모든 소식이 끝끝내 전해지지 못할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대로변에 버려져 부싯깃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한 채 바람에 바스락거리다 물가에 떨어져 아무도 읽기 못하게 번져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달을 맡기는 이들이 많은 것은 그 외엔 방법이 마땅치 않은 현시점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자원하였을 때 카게야마와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들까지 그를 찾아와 부탁하는 통에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배낭에 수첩을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무리라 카게야마가 기록을 하는 데는 그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와 안면이 있는 이가 카게야마로서도 도저히 잊거나 빼먹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하길 부탁하였을 땐 불의의 사고로 소실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연히 기록되었다. 이때 소실되는 것은 전달자다. 오늘날 죽은 지 최소 3주는 지나 발견된 이 사람처럼, 당연히 카게야마 자신도 언제든 그렇게 발견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만드는 그처럼. 더는 챙길 것이 없어 발을 떼며 고개를 들어 올리면 아직 O시의 이름이 적히려면 먼 표지판이 기울어져 있었다. 카게야마의 가방이 좀 더 무거워졌다. 이는 그가 챙긴 그가 받지 않은 전언의 무게보다 좀 더 무겁다.
오이카와의 가방은 이보다 가벼웠다. 그가 D시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어깨에 다른 이의 마음이 얹힐 일도 없었다. 과연 영리하였다. 그 대신 저보단 오이카와의 지인에 가까운 이들의 부탁까지 짊어지게 된 건 카게야마였다. 그러니 갈라진 아스팔트에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을 때, 저를 놀리는 그에게 다소 날카롭게 반응하여도 참작할 여지는 충분했다.
“까칠하기는.”
받아들여진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무렴 오이카와 씨만큼 하겠어요. 어쭈. 돌부리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는 그를 무시하며 앞서 나아갔다. 오늘은 날이 질 때까지 도로를 따라 걸어가야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목숨 보전의 측면에선 좋았으나,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도로, 휘어지지도 않는 직선 주로는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눈을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일지 횟수를 헤아리는 것 외엔 걸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답잖은 화젯거리가 다 떨어진 뒤엔 오이카와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아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진 지도 하루하고 한나절이 꼬박 지나 있었다. 오기라도 될까, 카게야마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오이카와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이 다른 무엇보다 카게야마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을 오이카와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길 중간에서 누군가의 유실물을 발견했을 땐 몇 마디 오가기도 했다. 덕분이라고 하기엔 고인에게 미안하다. 인내심 대결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카게야마가 눈을 떴을 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D시를 떠나고 수일 동안 혼자만의 여정을 떠나왔음에도 그 순간 카게야마에게 엄습하는 것은 분명 공포였다. 그간 걸어온 차로에서 우회전으로 빠져나가는 길 중간에, 포장되지 않았으며 수풀로 가린 도로 폭 밖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불렀을 땐 자신이 무엇에 안도하는지 알 수 없게 된 카게야마였다. 낭패라는 생각에 얼굴을 흐렸지만 그 얼굴이 그의 동행인을 즐겁게 하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그 옆엔 누가 숨기려 든 것처럼 자연스럽지 않게 낙엽이 덮인 차가 한 대 서 있었고, 그러나 끝내 찾으러 오지는 못한 것처럼 차창을 뿌옇게 가린 모래와 먼지가 그 손에 묻어나왔다. 오이카와 씨. 운전석 창 너머로 내부를 살피던 그가 범퍼를 텅 소리 나게 내리치며 히죽였다. 히죽이며 명령했다. 마침 차로도 비어 있겠다, 당연히?
“운전해. 토비오.”
“제가 찾아도 저한테 시키셨을 거면서.”
“토 달지 마.”
차 키는 바퀴를 괸 돌 아래에 깔려 있었다. 시동은 문제없이 걸렸다. 만약 차주가 그들에게 바통 터치를 한 앞선 낙오자였다면 수거에 문제는 없으리라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으리다. 차는 다소 거친 구동음과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흙길을 빠져나갔다.
3. 조망
“이와이즈미 씨가 O시에 계신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 쇼요 왔을 때. 쇼요가 말해줬어.”
당당히 조수석에 앉은 오이카와는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게 전방 주시나 지도 확인 같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의무를 요구할 생각이 없는 카게야마는 잠을 쫓기 위해 라디오를 트는 것처럼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반가움이 가신 뒤, 입에 올릴 화젯거리도 떨어진 뒤 카게야마의 말수는 다시 그 혼자 다닐 때처럼 줄어들었고 오이카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넌 여전히 내가 헛것처럼 보이나 보지? 언제는 그렇게 비아냥거리듯 말을 하기도 했지만 카게야마가 대답하지 않으면서 대화는 다시 끊어지고 말았다. 처음엔 신나서 말을 걸더니. 신난 적 없는데요. 생명의 은인에게 말하는 꼬락서니 좀 봐. 은인 아니시잖아요. 대답하지 않으면 긍정 또는 부정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경악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게 아닌 이상 침묵은 긍정처럼 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운전을 시작한 이후 다시 먼저 입을 여는 것을 보면 카게야마의 태도에 재차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는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물어볼 수 없었다.
오래전 히나타가 브라질에 체류할 적 두 사람이 이름을 부를 만큼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부지런한 그들의 친구는 카게야마에겐 미야의 소식을 전하고 오이카와에겐 이와이즈미의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의 연고지는 오이카와와 같았기 때문에 어쩌다 그가 O시까지 흘러가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치면 오이카와도 오랫동안 이 땅이 아닌 바다 건너 해외에 살고 있었으니 이제 와 어디서 흘러들어와 머무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더는 옛날처럼 평생 고향에 머물며 사는 게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지금은 고향이 언제 또 사라질지도 모르는 세상이기도 하여 중요한 것은 결국 지금 이 순간, 당장밖에 없는 건지도 몰랐다.
“미야라면 선수 쪽이겠지.”
“네.”
올림픽에서 만난 걸 기억하고 있었다며 말하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흘러가는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그렇게, 라는 표현은 좀 모호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지적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라고 밖에 할 말이 없는 관계였다. 그러는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어떻게 그렇게 되었냐고 하면 이들은 그들보단 좀 더 간단하겠다. 두 사람이 초등학교 클럽 때부터 함께 뛰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꿉친구. 덧붙이는 정보는 알지 못해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오래 알아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어? 하고 불이 튀었다며, 내내 심드렁하던 표정을 지우고 웃기 시작하는 오이카와를 곁눈으로 슬쩍 본 카게야마는 이내 운전대를 고쳐 쥐었다.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은 도로 위를 덜컹대며 나아가는 차엔 어차피 끝까지 갈만한 기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것으로 족했다.
“너는?”
제게 내밀어질 것을 예상한 바통이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입술을 축이며 말을 고른다.
교제는 카게야마가 졸업 후 성인이 된 후에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수 있지, 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절반, 그 전이 아니라? 라고 반응하는 사람이 반의반이었다. 나머지 반의반은 당연한 거 아냐? 라며 다른 반의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그들 중엔 카게야마보다 연상인 사람들이 많았고, 다른 두 경우 못지않게 카게야마를 무척 아낀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코치나 고문 교사 같이 그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어른들’을 제하면 학창 시절 선배이자 그와는 두 살 차이가 나던 스가와라 코우시가 가장 앞줄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는 하였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와도 동갑이었는데 그 말인즉 카게야마와는 함께 배구를 한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오랫동안 그를 신경 쓰며 그의 일을 제 일처럼 살펴주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가르침도 주지 않던 중학 시절 선배를 앞에 두고 카게야마가 연상한, 그와는 전혀 다르지만 다른 방향으로 만만치 않은 선배의 관록을 보인 스가와라는 여전히 S시에 머무르고 있겠거니 하였는데, 졸업 후 교직에 몸을 담은 그와 연락이 닿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이제야 생각이 미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그가 가족, 친구, 제자들을 두고 고장을 떠날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별일이 없다면 계속 그곳에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건 앞으로도 별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지만 카게야마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리 속도를 내지 않았음에도 과속방지턱을 넘어선 차가 좀 심하다 싶을 만큼 쿨럭이는 꼴을 보면 기름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멈출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솟았다. 미야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지기 시작한 건 고교 2학년 때, 청소년 국가 대표로 발탁되어 합숙 및 훈련을 함께하게 되었을 때였다. 좋았겠네. 국가 대표. 지금 상황에선 썩 의미 없는 사실이지만 유니폼에 국기를 달고 국제 대회에 출전한 경력은 운전석에 앉은 사람만의 경험이 아니었고, 조수 역할을 할 생각은 전혀 없는 조수석 탑승자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때의 그는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내고 빛을 내며 커다란 국기를 몸에 감은 후배와 달리 무명이란 무명천 외엔 두를 것이 없었다. 당시에도 드러내지 않은, 어쩌면 어쩔 도리가 없는 물리적 거리로 인해 직접 드러낼 수 없던 열등감을 이제 와 표출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제 말에 어이없어하며 돌아보는 후배의 반응을 즐기기 위함일 순 있겠다. 오이카와 씨도 했잖아요. 국가 대표. 됐고, 계속. 손을 휘 저으면 누가 누굴 위한 라디오가 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카게야마가 앞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도로 위 비스듬히 세워진 채 버려진 삼각대를 조심스럽게 비껴가느라 곡선을 그리며 나아가는 차였다. 이러다 기름도 고장도 문제가 아니라 차가 더 진입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어 차에서 내려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라는 듯 뚫리는 차로에 안심하며 내려놓는 걱정이었다.
“사귀게 될 줄은 몰랐어요.”
고백한 쪽은 미야였다는 모양이다. 호감은 쌍방으로 충분히 쌓았던 듯한데 확신으로 말미암아 내놓을 수 있는 최종 산물인 고백이 사실은 떨떠름했었다고, 카게야마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고백했다. 이를 남에게 말하게 될 줄도 몰랐으니 오이카와에게 털어놓게 될 줄은 전혀, 정말로 알지 못했다. 감히 비교하자면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 알지 못한 것과 비슷한 충격을 당시의 자신에게 안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표정만은 덤덤했기에 오이카와는 그 사실에 집중하기보단 미심쩍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길 택했다.
“좋아한 건 맞아?”
“그건 맞아요. 좋아했어요. 분명.”
“그럼 왜?”
그에겐 이보다 더 우스울 이유가 없겠지만 당시의 카게야마를 그가 어느 정도로 참작할는지. 사실 알았다. 그는 전혀 참작하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에 관해서 카게야마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그거 하나는 될 것이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카게야마는 대답했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이랑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요.”
대답이 입 밖으로 떨어지기 무섭게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이 처음 차에 시동을 걸었을 때의 시동음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는 감상은 무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 웃으세요. 그렇다고 정말 그만 웃길 기대하진 아니했으니 카게야마는 생각보다 자기 선배를 잘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와 미야의 교제는 올림픽이 시작될 때까지 유지되었으니 그들은 제법 장기간 연애한 셈이 되었다. 다만 카게야마가 이탈리아로 이적할 때쯤엔 장거리 연애도 한계를 맞이했고 올림픽 무렵에 오이카와가 목격한 그들의 관계는 정말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짐작하기 까다로울 지경에 이른 것이 맞았다. 서로 좋아하여 꿀 떨어질 기색이었다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좋아서 사귄다고 생각했겠지. 거기까지, 물론 그대로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생각한 시점에서 카게야마가 깨달은 것은 오이카와의 질문이 두 가지 모두로 해석될 가능성이 충분한 양면적인 질문이었다는 사실이겠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라면 의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작았다. 어쩌다 사귀게 되었는지, 어쩌다 헤어지게 되었는지. 이별을 고한 쪽은 카게야마였지만 이 역시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미야가 카게야마가 제 고백을 받아줄 줄 알고 고백했듯이 카게야마 역시 미야 또한 이별에 순응할 것을 알고 이별을 고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그들은 헤어졌다. 카게야마는 다시 소속된 이탈리아로 떠났고, 미야는 그대로, 블랙자칼에 소속되어 배구를 이어갔다. 카게야마가 애들러스로 돌아왔을 때도 그들의 관계가 새로이 진전되거나 변화하는 일은 없었다. 후유증은 없었다. 그리하여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도 그러했다고 기억하는데. 이제 와 자신은 왜 O시로 향하고 있는가 하면, 역시 미야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 외엔 거짓말이 되었다. 그 말에 얄밉게 빈정대는 오이카와에 카게야마는 미간을 찌푸린다.
“이별도 처음이라 그런 거 아냐?”
아주 지독한 첫 연애 후유증 나셨다며 놀리려던 오이카와의 말을 단박에 부정하여 끊어버렸다. 그래그래. 네 연애지 내 연애냐. 질린다며 손을 흔드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도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 첫 연애의 후유증은 아니었다. 무언가의 후유증이라면 세계 멸망의 후유증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잠깐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에 겪었던 일에서 말미암아 전환된 사고요, 새삼 응시하게 된 감정, 또는 새로 틔워진 감정일 수도 있었다. 최근에 겪은 사건이 무엇인지는 입에 담아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는 예습이란 명목하에서도 뇌까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카게야마. 숙여.”
직후 앞바퀴가 덜컹대며 바퀴가 헛돈다고 느꼈다. 카게야마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것과 그 말대로 행동하여 따르는 것은 동시에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뒷좌석, 그 뒤엔 조수석의 창문이 순서대로 쩡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카게야마는 몸을 숙인 채 운전석 문을 열어 내린 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바짝 몸을 기댔다. 훌륭한 엄폐물로 수명을 끝마치게 된 승용차의 임종을 지키는 눈에 바퀴에 감긴 녹색 그물망이 보였다. 새를 잡을 때 쓰는 그물은 사람을 잡는 데도 유용했다. 순순히 잡힐 생각은 당연하지만 전혀 없다.
“오이카와 씨.”
“여기 있어.”
팅, 팅, 탕, 텅. 쿵, 쾅, 우지끈. 아무렇게나 표현되는 소리, 소음 속에서 카게야마는 이제 와 자신은 왜 O시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여전히 대답은 한결같으니 그곳에는 미야가 있었다.
4. 잔음
입 안이 터져 고인 피를 퉤, 뱉어냈다. 다른 무엇보다 손을 주로 쓰는 운동선수였던 그가 주먹싸움에도 걸출한 재능을 가졌음에 특별히 주목하여 기뻐하는 이는 없었지만, 어떤 재능이든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낫다 못해 생존에 도움 되는 세상이라 나쁜 것은 없었다. 차는 퍼졌지만 죽진 않았고, 배낭은 너덜너덜해졌지만 새 가방을 구할 수 있었으며 내용물은 그 난리 통에서도 건재하여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손실과 수확이 뒤섞인 상황에서 가장 큰 성과는 역시 이 가운데서 그가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를 지켜보며 쭈그려 앉아 있는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줄 여유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호전적 성향으로 따지면 저 못지않을 그의 외양은 멀끔했으나 카게야마는 그에게 왜 저를 돕지 않았느냐고 책망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실 그는 가장 처음 머리를 숙이라고 경고한 시점에서 그보다 더 전, 생명의 은인 운운하던 제 말을 완벽히 증명하여 그 이름을 제 것으로 만든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전투가 끝난 후 딱 한 마디만 입에 담았을 뿐 이전처럼 제게 감사한 줄 알라며 깐족대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차라리 그가 전처럼, 이와이즈미가 그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잔소리하던 이전처럼 굴길 바랐지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부탁을 온전히, 순순히 들어줄 인물은 아니었다. 생전 사후 어느 때고 그가 카게야마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만 대하는 날은 오지 않는 것처럼. 정수리와 너덜너덜한 바짓부리와 옷소매에 내려앉은 모래,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상체를 일으켰을 때였다. 앉아있던 오이카와도 몸을 일으켰다.
“왠지 미안하네.”
“미안할 일 없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그건 카게야마도 어떻게 해줄 수 없어 침묵 외엔 도리가 없었고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멀리서 폭음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으나 귀로 가늠하면 그 거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엔 멀었기 때문에 새삼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대신하여 주변을 살피는 것은 오이카와의 몫이 되었다. 그 역시 저희는 안전하다 판단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변엔 고층 건물이 더는 보이지 않아 시야가 훤했다. 차로를 따라 걷는 중에 가드레일 너머엔 강이 놓였고, 잔물결이 노을로 반짝일 때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게야마였으나 라디오가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타인의 기분을 살피어 화제를 고르는 것을 쉽다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능히 합을 맞추고 대화를 편안히 끌어내는 재주를 가진 자는 저의 노력을 알지 알 수 없었다. 신발에 들어간 모래가 까끌하니 발바닥에 배겼지만 예정된 물집을 시간의 뒤축에 매단 채 계속 나아갔다. 털어낼 여유조차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빨리 O시에 도착하여 이 여정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그보다는 더 컸다. 꼴꼴꼴꼴 흐르는 잔잔한 물소리에 어디까지 상념을 씻어내고 흘려보낼 수 있을까. 격렬하던 심박이 고요히 가라앉은 뒤 말밑천으로 적당한 이름을 고르는 와중에 어째 미야가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과 저희 관계에 공통 요소가 예나 지금이나 그리 풍부하지 않음에도 이음매는 단 한 군데만 있으면 충분한 듯하였다. 사라질 것 같아도 그 하나만 있으면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이어질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 씨와 만나면 뭐 하실 거예요?”
“이와쨩이랑?”
카게야마의 배낭에 담긴 수첩, 비망록에는 이와이즈미에게 보내는 전언도 적혀 있었다. 이와이즈미에게 전할 말을 카게야마에게 맡기지 않은 오이카와였으므로 부탁한 사람은 D시에서 지내는 동안 가까워져 카게야마의 지인이 되기도 한 오이카와의 친구 마츠카와 잇세이였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가 D시를 떠날 것을 정녕 알지 못했을까. 물어보기엔 이젠 D시보다 O시에 더 가까운 땅에 서 있는 그들이었다.
“뭐 하겠어. 사랑해야지.”
사랑이나 해야지. 사랑 외에 무얼 할 수 있겠어. 그 말이 맞았다. 카게야마도 미야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같아. 그렇게 말했다니까.’ 지금 생각해도 이보다 더 한심한 고백은 없었을 것 같다며 웃는 그가 시야에서 흐려졌을 때는 스스로 재지 않으면 알려줄 사람이 없는 열에 끝내 발을 헛디디기 직전이었다. 카게야마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그라도 수일째 제대로 숙면을 하지 못한 채 이동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사실 그 점에서 실패한 자기 관리였으니 변명할 길 없이 허물어지는 몸뚱어리였다. O시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폐건물 안으로 간신히 기어들어 가 가방을 베개 삼고 대충 깐 모포를 요 삼아 쓰러져 눕고 말았다. 배는 아프지 않으니 무얼 잘못 먹고 탈이 난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길 바라야 했다. 어지럽고 정신없고 머리가 아픈데 여기에 배탈이 겹치는 건 극구 사양이었다. 물을 잘못 마신 건 아닐까? 수인성 질병이라면 약을 구할 길도 없었다. 배낭에 들어 있는 해열제를 털어먹고 물통의 물마저 비운 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한숨 푹 자면 나아질까? 그러나 잠이 들기 직전까지가 고역인 법이었다. 카게야마는 저로 인해 발이 묶인 오이카와가 제 곁에 있으리라 예상하며 입을 열었다. 두고 가셔도 돼요. 얼마 안 남았잖아요. 과연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 남아있었는지 쯧, 혀 차는 소리 뒤 저를 그렇게 망나니로 보지 말라는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어둠에 잠긴 시야 대신 귀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로 세상을 분간할 수 있었다. 입으로는 열이 높아 제대로 제어되지 않은 말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왔다. 자라면서 조금씩 고쳐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선 도로 아미타불이겠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되시잖아요.”
성장의 증거는 실수했다는 자각이 전보다 빨랐다는 점에 있을지도 몰랐다. 곧장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그가 정말 저를 두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진작 이랬어야 했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기회를 틈타 침범하는 불안을 몰아냈다. 잘못을 합리화한다고 보아도 할 말은 없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합리화의 과정 중 하나인 것은 알지만 마주 보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은 것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인한 외면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가능한 핑계였다. 그러나 고열로 끓어올라 오롯하지 않은 의식에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죄송해요.”
“됐어.”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들려오는 대답에 하마터면 친절하게 굴지 말라고 기어이 한 대 맞을 소리를 입 밖에 낼 뻔한 카게야마였다. 그렇지만 그런 건 그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이제는 달리거나 도약하지 않는 그를 연상하는 것만큼. 더는 살아있지 않은 그를 회상하는 것만큼 그와 조화되지 않았다. 차라리 마지막까지 투지를 불태우고 투기를 부리고 투덕투덕 저와 부딪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속 뒤집힐 소리를 늘어놓으며 성격 나쁜 선배로 남아있어 줘야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따라잡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나마 수월할 게 아닌가. 카게야마는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는 까닭에 이 모든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길 한중간에서 그를 만난 순간부터 카게야마는 입 밖에 내어선 안 되는 말을 스스로 주지시켰다. 그것은 떨어질 일 없이 널뛰는 열로 온몸이 달궈지는 지금도 마찬가지라, 끊어질 것 같은 얇은 정신으로 말하는 순간 끊어질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겐 아직 이 여정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디서 어리광을 부리냐고 내쳐진다고 해도 아직은 좀 더, 어릴 적처럼 쫓아가 조르며 붙들고 싶었다.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두고 가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냐는 폭언이라는 점에서 실은 어느 쪽이 진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전부 진심이다. 두고 가라는 것도, 같이 가자는 것도. 이제 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진심이듯이 양분되다 못해 소분된 진심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동하고 전파되다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융화하여 사라지기도 했다.
“뭘 해줄까?”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눈을 뜰 수 없었고 다가붙는 접촉도 없었지만, 카게야마는 만약 그와 자신이 중학생 때였을 때 그가 지금처럼 물어보았다면 자신은 일말의 고민 없이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 자신은 그때의 자신을 부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브 가르쳐주세요. 되지도 않는 장난으로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엔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세상이었으니 뇌리에 맴도는 것은 유년기에 발화된 주제에 아직도 그치거나 사라지지 않은 소리였다. 그는 재촉하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마치 그가 빨리 말하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초를 세기라도 한 것처럼 조바심을 느낀 끝에 간신히 대답을 결정했다.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쉬웠다. 그가 또 언제 제게 ‘뭘 해줄까’ 이렇게 물어보겠냔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면.
“이야기해주세요.”
아무 이야기나요. 카게야마가 요구한 것은 이야기였다. 이와이즈미 씨 이야기도 좋고, 오이카와 씨 이야기도 좋고.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일도 좋아요. 해외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적 카게야마는 한 번도 아르헨티나에 가지 않았다. 후회할 정도는 아니나 나중에는 조금 아쉬워졌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한 번뿐인 기회를 이리 사용하는 것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도 에계, 겨우? 식으로 사용된 소원권을 폄하하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머리맡에 누인 배낭엔 마츠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적어 보내는 편지도 수첩 중간에 끼워져 있었다. 어릴 적, 학창 시절쯤에 공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교과서를 베고 자면 책의 내용이 자연히 머릿속으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 있었는데, 이는 지금도 유효한 바람이었다. 그러니까 카게야마는 아직도 그가 자신의 공상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실은 모두 자신이 기억은 안 나지만 몰래 뜯어보았을 편지에서 기인한 공상일 수 있었다. 공상이길 바라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공상이 아니라면 이 여행 끝의 헤어짐도 공상이 아니게 되니까. 공상이 아니길 바라는 이유는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였다. 고열로 들뜬 카게야마로서는 자신이 정말 편지를 뜯어보았는지 아닌지 기억해내지 못했으므로,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가 떠다니든 상관없이 시작되는 이야기의 진위를 그로선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시작되고, 이어질 뿐인 이야기였다. 그가 바란 대로. 그럼 순서대로 해볼까. 음, 이와쨩이랑 처음 만났을 때는 우리 집 옆집에 살았는데…….
열이 떨어진 건 새벽녘이었다. 목이 말라 눈을 떴지만 잠들기 전 남은 물을 남김없이 마셨다는 사실이 생각나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때처럼 툭, 떼구루루. 굴러오는 생수병이었고 카게야마는 제 앞으로 굴러오는 페트병을 잡아 멈췄다. 이번엔 놀라지 않고 집어 들자 좀 실망했다는 듯한 숨소리가 좀 더 높은 위치에서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는 자리에 일어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오이카와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구도에선 저와 그 사이에 네트가 있고 저희가 딛고 산 땅은 코트여야 할 것 같은데 콘크리트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서늘할 뿐 준비된 건 없었다. 일부는 신문지로, 일부는 노란 박스 테이프로, 그리고 일부는 조각난 유리 조각이 창틀에 산재한 유리창 너머로 새벽의 푸른 빛이 안개처럼 넘실넘실 넘어와 주위를 덮고 있었다.
“가세요?”
가다듬지 않은 잠긴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졸린 눈을 비비지 않은 채 그를 배웅했다. 그래.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 말은 배웅엔 적절치 않으며 저를 두고 가라고 할 때 내뱉은 말이기도 했지만 새삼 부끄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고맙게도 오이카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웃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와쨩이 마중을 나왔지 뭐야.”
마중 나온 사람이 있다는데 카게야마가 그를 감히 붙잡을 순 없었다. 조심히 가세요. 너도, 조심히 들어가. 꾸벅 인사를 마친 뒤 카게야마는 자리에 다시 누웠다. 저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열이 내렸기 때문에 훨씬 편안하게 잠들어야 옳았지만 카게야마는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했다.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날이 어느 정도 밝아지자 곧장 몸을 일으켰다. 별일 없다면 아마 오늘 안에 O시에 도착할 것이다.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5. 계명
카게야마는 해가 지기 전에 O시에 도착했다. 치안을 위해 어느 도시나 출입을 통제하고 신분을 확인하기 때문에 도착했다고 해서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도시 경계의 임무를 맡은 이들은 D시에서 왔다고 진술한 카게야마의 몸수색을 마치고 신분을 철저히 확인할 때까지 굳은 표정을 풀지 않다가, 마침내 출입을 허가한 후에야 얼굴을 풀며 살갑기 대하기 시작했다. D시에서 오셨다고 했지요? 통신선이 끊기고 나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저희 시댁이 D시에 있거든요. 두 사람 중 나이가 많은 중년의 이름을 묻고 혹 그에게 전해야 하는 전언이 있는지 수첩을 열어 확인하는 사이, 그보다 좀 더 어린 얼굴을 한 청년이 쭈뼛대며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이름을 묻자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재빠르게 제 이름을 외친 그는 종이를 넘기는 카게야마를 제지한 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카게야마 선수 맞죠. 저 어릴 때 TV에서 배구 경기하는 거 봤었어요. 올림픽이요. 진짜 멋있었어요.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다는 그는 카게야마에게 받은 사인을 주머니에 소중히 집어넣은 뒤 어깨에 잔뜩 신바람이 든 채 자리로 복귀했다. 아이고, 저리도 좋을까. 훈훈한 미소로 멀어지던 등을 좇던 연장자는 카게야마에게 얼른 들어가 보라며 손짓한 후 덧붙였다.
“일행은 더 없는 거죠?”
“네.”
등 뒤에서 닫히는 문을 보다 고개를 돌리면 도시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지러이 엉켜있는 길, 볼품없이 꺾인 한때는 관광명소였을 철탑과 난리 통에도 꿋꿋이 풍채를 유지하는 건물들은 아직 허름해지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O시는 D시 못지않은 대도시였다. 그러나 덩치가 우람할수록 속은 곯기 쉽고 유지 보수할 곳은 넘쳐나기 마련인 것을 D시에 살았던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아마 O시도 D시와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해 거기나 여기나 사람 사는 곳이라는 뜻이 되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얼추 비슷하기 마련이다. 카게야마는 혹 찾는 사람이 있냐며 친절을 베푸는 문지기에게 좀 더 포괄적일 수 있도록 역으로 뒤집어 반문했다. 여기서 사람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찾아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카게야마가 저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냉정하게 쳐냈으면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질이 나긋나긋하거나 부드럽지 않은 그라도 쳐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는 부탁을 거절할만한 심보는 되지 못했다. 애초에 그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에는 먼저 묻지 않은 정보를 선의로 건네준 히나타를 배제할 수 없었다. 물을 자신도 없는 자신을 신경 쓴 성의를 자신은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한 성의로 넘겨버렸을 뿐 그에 비하면 자신은 크게 의미 있는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도 안내받은 관공서 건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이름은 수첩에 적힌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니었다. 무얼 도와드릴까요. 저,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여기에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러한지 알 수 있을까요. 출입 명부를 관리하는 그들은 더는 컴퓨터로 대체할 수 없어 모조리 수기로 작성하게 된 명부를 책상 양옆에 잔뜩 쌓아둔 채 이름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카게야마가 그를, 성과 이름을 포함해 모두 부른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리다.
“미야…… 아츠무요.”
“미, 야, 아츠무…… 잠시만요.”
잠시 후 카게야마는 그가 도시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엔 히나타가 우려했던 것처럼 영구히 떠난 것은 아니고 사흘이면 돌아올 근교로 식량을 조달하러 갔다는 부연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며,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은 돌아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역시 그가 사랑하던 배구를 계속할 순 없던 모양이었다. 그 왜, 미야 씨가 연초에 좀 안 좋은 일을 겪으셔서 그런가 그 뒤론 밖을 돌아다녀야 하는 일에 많이 자원하시더라고요. 아무리 카게야마가 자신을 미야의 지인이라고 소개했다고 해도 다소 방정맞게 입을 놀리는 공무원을 훈계하는 일은 그 옆에 앉은 사수가 대신해주어 카게야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았는데 공무에 임하는 자세를 무너뜨려서야 되겠냐고 설교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까마귀가 옥상 가장자리마다 조금씩 간격을 두고 앉아 까만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고 날이 지려면 아직도 아직 멀었다. 카게야마의 일도 끝나지 않았으니 밝을 때 돌아다닐 수 있어 다행이긴 하였다. 미야의 행방을 확인한 후 더 확인할 사람이 있냐는 물음에 카게야마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었고 조금 후에 어두워지는 얼굴도 볼 수 있었다. 그건 출입 명부를 쌓은 탑과는 다른 탑의 최상단에 놓인 서류와도 연관이 있는 듯했다. 그게, 저. 짐작했기 때문일까, 카게야마는 놀라거나 크게 충격받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었다. 혹시 가까운 지인이 계신다면 그분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그는 카게야마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카게야마는 마츠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보낸 편지를 아직 상장도 떼지 않은 하나마키를 찾아가 전달한 뒤, 방문했던 관공서로 다시 돌아와 수첩을 비롯한 비망록과 하마터면 깜박 잊고 전하지 않을 뻔한 D시의 공문을 통째로 떠넘긴 뒤 그곳을 다시 빠져나왔다. 무책임할지 몰라도 그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모르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강한 친구였던 히나타를 새삼 떠올린 것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O시에도 카게야마의 지인은 꽤 많이 남아있는 편이었고 덕분에 숙식에 어려움을 겪지는 아니했다. 카게야마가 왔다는 이야기에 그를 찾아와 집으로 흔쾌히 초대한 오지로는 미야와 고등학교 동문이면서 카게야마와 함께 국가 대표 선수로 활약하여 카게야마와도 적잖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미야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그로부터 가장 최신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카게야마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미야의 모습을 그제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O시에서도 D시와 마찬가지로 통신선이 파손된 구간을 찾는 것에 겸하여, 위험할지라도 각 시를 이동할 연락책을 파견하려 하고 있었다고 오지로는 말했다. 거기에 미야가 자원하려 했다는 이야기에는 카게야마도 조금 눈을 크게 떴던 것 같았다.
“다행이지 않나. 하마터면 엇갈릴 뻔했다 아이가.”
그 말은 옳았다. 카게야마라도 또다시 혼자 이 여정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실은 그가 이 여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다고 하더라도 카게야마는 분명 그리 생각했고 그 생각을 바꾸지도 않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혼자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튿날 오전 6시쯤 하여 도시를 떠났던 이들이 다시 귀환했다. 카게야마의 기상 시각은 대체로 일정한 편이었고 6시는 조금도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문제없이 눈을 뜬 뒤 나갈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먼저 나간 오지로가 한쪽 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 가는 동안 들리는 대화엔 카게야마도 아는 이름이 여럿 섞여 있었다. 아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키타 씨야 여전히 건강하고…… 우리 중 할매가 제일 오래 살지도 모른다캤다가 한 대 얻어맞아서 아직도 등짝이……. 유쾌함은 전보다 덜할까. 그러나 카게야마가 기억하는 전은 너무도 오래되어 중간에 뚝 이가 빠진 징검다리 같은 간극이 그들 사이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그 간극이라는 것은 조심만 한다면, 그리고 충분히 해볼만하고 도전할만하다면, 마지막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으로 가득 찼다면 뛰어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품는 이유는 카게야마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를 기어코 O시에 데려다 놓은 이유이기도 했다. 인기척을 느낀 오지로가 웃으며 옆으로 물러서 주었다. 아츠무. 누가 왔는지 보래이. 미야와 달리 카게야마는 그를 만났을 때를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가정하고 상상하며 모의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은 적어도 미야보다는, 눈을 크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여지없이 ‘나 충격받았어요’ 표정을 짓는 미야보다는 나은 표정을 짓고 있을 터였다. 그 생각은 카게야마에게 작은 만족감을 주었고 덕분에 카게야마는 그를 보며 웃을 수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오지로가 둘이 얘기 잘 나누라며 다른 이들과 함께 먼저 빠져나가자 새벽녘의 거리에 남은 사람은 카게야마와 미야 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는 허둥지둥하는 미야를 보다 입 속에서 고르고 고른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아츠무 씨.”
“……토비오.”
새벽녘에, 주변에 들려오는 소리 중 가장 큰 것은 그들의 숨소리였고 이윽고 미야는 머쓱한 기색을 떨치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려 정적을 지우려 했다. 아, 뭐꼬! 지인짜 오랜만이다. 토비오야. 우리 대체 얼마 만에 만난 기고? 어인 일이진 모르겠다만 억수로 반갑네……. 내는 또 설마 내 만나러 왔나 착각할 뻔해서……. 그러나 그 말을 부정하여 끊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마침내 직시한 순간 미야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부정의 말임에도 너무도 원했던 말에 불안하게 괜히 주변을 살피던 시선이 끝내 카게야마에게로 떨어졌으며, 함께 떨어뜨린 것은 아무래도 샘 안에 오래 눌러 담은 눈물이겠다. 아뇨. 아니에요. 뭐가 아니냐면, 똑바로 들어요.
“아츠무 씨 만나러 온 거 맞아요.”
미야를 다시 만나면 무얼 할 것이냐는 반문을 받았을 때 카게야마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었다. 사랑해야죠. 저도. 흐음. 컨닝하는 것 좀 봐. 컨닝 아니에요. 근데 너 아까는 그 사람은 너 이제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그 말에 하! 소리 내 웃던 선배의 얼굴을 카게야마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연애에 관해선 아직 내 발꿈치도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토비오쨩. 그에 발끈하지 않고 묵묵히 사실로 쏘아붙였던 자신도 기억하고 있다. 실연 횟수가 자랑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말에 한바탕 왁왁 언성을 높였지만 그래도 끝은 제법 훈훈하게 낸 것까지도 그는 기억한다. 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화라고 할지라도 카게야마가 기억하는 한 그것은 그렇게 기억되어 이어질 것이다.
기왕이면 혼자 하지 말고 서로 해.
다시 만나서 혼자 짝사랑이라니 코트 위의 제왕 꼴이 처량하게 그게 뭐야, 진짜. 오이카와 씨야말로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이 아직도 쌍방으로 불타는 중이라고 믿으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 망할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말하는 것 좀 봐! 아, 진짜…… 이와쨩 보고 싶어, 나. 진짜로.
저도요.
넌 또 왜. 아뇨, 그냥. 그냥 그래서요.
“보고 싶었어요. 아츠무 씨.”
젖어 드는 어깨를 느끼면서 그를 더욱 바투 끌어안았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사랑 외에 무얼 할 수 있겠나. 사랑이나 해야지 무얼 하겠나. 카게야마는 그 말을 따랐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