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遭命)
- gwachaeso
- 3월 19일
- 1분 분량
<주술회전>
후시구로 토우지 단문. 팬아트
조명이 붉은들 남자의 눈이 제 앞치마에 튄 핏자국을 몰라 볼 일은 아무래도 없었다. 앞치마를 입었음에도 목, 팔, 얼굴까지 튀고 만 피는 제법 유감이었다.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도 썩 깨끗하진 못하지만, 시야에 걸리는 머리칼이 거치적거릴 뿐인 남자는 덕분에 얼굴에 얼룩이 묻어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긁고 얼굴에 튄 피를 훔친다. 이윽고 꼴은 더 엉망이 되지만 감히 남자를 앞에 두고 꼴이 그게 무엇이냐고 지적하거나 비웃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조명이 붉은들 앞치마에 튄 그것들을 가릴 수 있을라고. 물론 지금 남자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살아있는 사람도 뒷걸음질 쳐 도망칠 장소에 서 있는 건 남자뿐이다.
처리를 끝낸 '물품'은 일찍이 자루에 담아 벽에 기대 세워두었다. 쾌락을 모르지 않는 남자이나 자신의 직업에 어떠한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이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진 않으므로 그것은 '작품'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 '상품'의 정의와도 들어맞지 않았다. 판매한 것은 그 자신의 노동력이고 저것은 의뢰한 바 수행한 결과로 나온 목적의 부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러한 자세로 제 직업에 임하고 있었다. 작업에 임하매 지금껏 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 모른다. 이 다음, 또는 그 다음의 다음엔 스스로 자세를 무너뜨려 자세뿐이랴, 이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지.
근데 그런 게 있던가.
그런 게 제게 남아 있던가. 그리고 그게 지금 저와 상관 있는 단상인지. 정답은 없다, 그리고 아니다, 이기에 남자는 곧 그 단상을 끊어내어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조명이 붉은들 그 빛에 눈 멀어 눈 앞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남자의 눈은 그보다 밝다. 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