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극의 끝
- gwachaeso
- 3월 20일
- 4분 분량
<검은방>
검은방 3 노말엔딩 이후의 하무열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이다. 단 한 번의 반항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날에 모든 것이 함께 끝났으면 좋았을 테지만, 모든 게 엉망진창인 채로 어영부영 굴러가는 것이 앞으로의 제 삶이라고 했다. 그대로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도 그런 바람 따위 이뤄지지 않는 삶. 개인적으로 친분 깊이 쌓은 이는 없으나 믿을 수는 있었던 동료들의 눈에 가실 일 없을 의심이 서리고, 조사와 심문은 이튿날 마저 이어질 예정이란 통보에 고개만 주억거리는 것이 앞으로의 생. 버틸 자신이 없다 우는 소리 입에 담을 자격 감히 없는 그는 오늘도 하루가 저물자 집으로 돌아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대로 모든 것이, 제 삶과 의식도 이 하루와 함께 끊기길 바라는 메마른 자의 부질없는 바람에는 죄악감이 함께 서린다.
환히 웃으며 그를 반기는 누나는 이제 악몽이 되어 있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눈을 뜨면, 그를 놀리듯 제 바늘을 째깍째깍하는 시계는 네 곁에서 죽은 잠을 보라며 반야의 기상을 재촉한다. 일어나라고, 네 누나는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데 너는 이렇게 잠을 청할 자격이 있냐고. 텅 빈 집안의 구석으로 내몰린 자는 먼지가 내려앉은 세 사람의 가족사진 앞에 조용히 놓이는데, 이것이 생시인지 몽중인지 그는 분간하지 못한다. 분간하지 못한 채로 그리도 무서워하며 도망쳤던, 그때와 똑같이 미소 짓고 있는 자를 내려다본다. 양옆의 팔을 붙잡고, 가운데에 서서 짓는 짓궂은 미소는 일전과 같다. 기억과도 같았다. 수일이 지나 마음 한구석에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은 것들을 한데 몰아 치워버린 무열은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그 사진만은 치우지 못했다. 치우기엔 너무나 말간 웃음을 짓고 죽어버린 당신 때문에. 당신이라서.
아, 죽음을 최초로 영원한 잠에 비유한 자는 누구인가. 알지 못하나, '누나처럼 나도 영영 잠들면 좋겠는데.' 같은 말은 이제 평생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된다는 걸 아는 자에게는 세상 모든 일이 어영부영 흘러간다. 연상마저 죄스럽게 느끼는 자의 눈이 액자 유리에 비치면 눈가 아래로 내려온 짙은 그늘로 한껏 어두워진 눈이 다시금 남자를 응시한다. 이에 무열이 손을 들어 액자를 덮어놓으니 눈도 덮인다. 다시 여는 날은 그 새벽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이다. 세월이 그에게도 관통하니 하무열에게도 그날을 정리할 기회가 찾아왔다. 원했지만 손에 넣을 수 없던 것, 손에 닿길 꺼렸던 것을 손수 끄집어낸 자는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다. 그는 자신과 그가 같은 인간임을 강조하는 자로, 무열은 그 사실을 긍정한 적 한번 없으나 마지막 한 발이 남았을 때 결정한 결정과 저지른 일 또한 긍정할 수 없어 부정할 수 없었다. 우습게도, 옥상에 올라갔을 때도 굳히지 못했던 마음에 불을 지른 자는, 꾸물꾸물 기어 오는 과거의 자신처럼 되지 않길 바랐던 후배였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어린 후배와 그 뒤에 비치는, 검은 총구에 누나의 마지막을 겹쳐 본 자신. 웃음을 터뜨린 주최자가 스위치를 누르고 이번 ‘게임’의 범인이 끝내 죽이지 못한 죄인을 감싸 안았을 때, 무열도 너털웃음을 쳤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녀석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알람 시계는 더 이상 그를 깨우지 못할 것이다. 그를 깨울 알람 시계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강민이 이때껏 감추고 있던 총을 내보이는 순간 무열은 서랍 속에 구겨진 채 아직도 남은 가족사진을 태우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누나. 그리고……. 그들 사이 멋쩍게 웃고 있는 어느 청년의 사진. 이 자야말로 모든 원흉이라며 자신을 속였으나 최후까지 속일 수 없었던, 저의 손위 형제를 죽게 만든 자를 죽게 만든 자신이었던. 무열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다.
‘그렇지만 이 녀석은 아니야.’
그러한 이유로 그는 열기에 익어 가는 다리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등 쪽에서 번져오는 무언가도 무시하며, 후배를 감싼 채 뛰어내렸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리고 실패했다.
큭큭 웃은 그는 새로 꺼낸 흰 담배에 불을 붙인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연초를 무는 무열을 맞은편에 앉은 형사는 포기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멀쩡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을 모두 귓등으로 들었다.
‘정신 차려보니 ‘어머나 세상에!’인데, 담배 하나 정도는 봐주라고.’
입원실 안은 불편하다고 하여 휴게실로 나왔다가 담배까지 뜯긴 후배에겐 그래도 한숨 쉴 기력이 한 움큼이나마 남아 있다. 불평하고 싶어도 기적적으로 회복한 선배에게 화를 낼 순 없다며 되뇌는 그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 무열의 모습을 목격한 자로서 그를 위한 아량을 좀 더 내어놓는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선배와는 진작 관계를 끊었어야 했는데. 투덜거리고 싶어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보면 또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겠나. 중태로 병원에 실려왔지만 용케 회복해 내고, 몇 없는 지인의 걱정 속에 일어났지만 중요한 순간엔 한 발짝 늦어버린 불쌍한 남자.
하무열 경사가 깨어났을 때는 상복을 입을 시간마저 지나간 이후였다.
류태현 순경의 사인은 확정된 이래 변경되지 않았다.
그의 입원실에서 총성이 울리기 전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 사건을 캐물었던 형사는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과 죄책감을 원인으로 짚었다. 무열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한참 말을 꺼내지 못하다, 유서가 남아 있었다는 말에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주제에 벌어진 입을 그제야 다물었다. 희망 따위 남아있지 않은 암울한 세상에 사랑하던 연인은 그가 만들어 낸 괴물의 손에 붙잡히고 의지할 수 있는 선배는 중태에 빠졌다. 눈앞에 있었음에도 구하지 못한 사람들.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눈을 뗀 사이 주검이 되어 돌아온 사람들. 범인으로 지목해야 하는 사람들. 그러한 가운데 그가 가진 직업적 사명 의식은 그가 이미 짊어진 중압감을 가중했는가? 스스로 몸을 던진 이는 그의 의지에 쩍 하고 금을 냈으니 그것은 최악의 순간에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면서 시작된 비극이었는데, 아무도 남지 않은 순간에 도착한 것은 승아의 사진과 작은 권총.
유서의 마지막 한 줄까지 읽어 내린 선배의 표정은 후배는 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유서를 읽어내린 그는 의자에 앉아 숨죽이고 있던 남자의 안부를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너지면 안 되겠지.”
사라진 이들을 추적한 형사들은 끝내 강민을 붙잡지 못했다고 한다. 태현도, 무열도 초대받지 못한 네 번째 현장에선 역시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이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 살해당해 마땅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조사 중이나 CCTV는 진작 망가져 있어 무어라 답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했다. 백선교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범으로 알려진 강민의 생사 역시 확신할 수 없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지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대로 살인극이 계속 이어질지, 멈출지. 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니,
“무너지면 안 돼.”
무너지면 안 된다. 포기해선 안 된다. 이제 와 이 길을 권유하지 않았다면 나았을까 자책하기에도 때는 너무 늦었다. 자신과 같은 길로는 들이지 않겠다고, 그라면 다른 길을 걸으리라 생각하고 마음먹은 모든 일이 우스꽝스러워졌지만, 그는 반쯤 남은 연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수첩을 덮고 일어나는 후배에게 라이터와 담뱃값을 돌려주는데, 이거야 원, 새로 한 갑 사다 주는 게 나은 꼴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그는 환자복에 자욱이 밴 담배 냄새를 걱정하기로 했다.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에 입원실도 오래 비우고, 이만하면 타박 들을 행동이란 행동은 모조리 하고 돌아가기로 결심한 사람 같을 것이다. 이 나이를 먹고 반항이다. 그는.
“그럼, 조심히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돌아본 하늘은 꼴사나운 인간의 꼴과 달리 쾌청하고 맑았다. 그날에 관한 모든 조사가 끝난 후의 하늘도 이와 같았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무열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끝까지 선을 넘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도 시계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완벽히 타들어 사라지긴커녕 마음에 꺼멓게 눌러앉은 언젠가의 재는 허파에 질척하게 들러붙은 타르를 연상하게 한다. 어느 목소리를 귓가에 재생하게 한다.
‘금연하시지 그래요. 요즘 다들 끊는 추세던데. 건강 생각하셔야죠.’
류 순경―태현의 충고에 귀를 막고 장난치던 날이 떠올랐다. 태현 군. 태현 군이 본 하늘은 어떻던가. 혼자 살아남아 바라본 하늘도 과연 이토록 맑았는가. 물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