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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해거름과 유구무언A

  • gwachaeso
  • 3월 20일
  • 5분 분량

<검은방>

진엔딩 이후의 여승아



복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병실이었다. 혼자 쓰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넓고 호화로운 1인실을 기대하고 문을 열었다면 애석하지만, 작아도 혼자 사용하는 데는 무리 없는 병실에도 노을이 졌다. 이 방엔 거동에 문제가 없음에도 침대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는 환자가 한 명 머물고 있었다. 간병인은 없었다. 혼자 생활하는 데 어려움도 없을뿐더러 장기 입원으로 나가는 돈이 상당하기에 그 외는 욕심 낼 처지가 못 되기 때문이다. 1인실 중에선 가장 작지만 6인실에 입원할 때의 비용과는 차이가 크다. 그래도 퇴원이 멀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더는 이곳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장기 입원 환자면 으레 그렇다만 그를 찾아오는 문병객도 많지 않았다. 오랜 연인과 몇몇 지인들 정도. 하지만 그들의 방문도 환자의 고독을 달랠 만큼 잦진 않았는데, 이들의 생업도 원인이지만 경찰이 병실의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때문’이라는 표현을 쓰면 경찰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려서 정정이 필요하다. 경찰의 통제가 없었으면 반대로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갈망했을 것이다.


대기업 오너 일가와 유명 종합병원 병원장의 아들이 죽은 사상 초유의 사건에 얽힌 피해자 A가 있었다. 사실 두 사람보다 더욱더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세간에 크게 알려진 피해자는 그 두 사람이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의료 사고를 낸 의사나 오래전 불명예 제대한 군인은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덜했고, 소시민들은 그보다도 덜했다. 그렇지만 생존자는 얘기가 달라 만만한지, 그를 인터뷰하고자 병원 담을 넘어 접근하는 기자의 수가 셀 수 없다고, 어느 날 복도를 통과하던 형사의 이야기를 엿들은 적 있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기자들이 살아남은 저희의 사정을 날조하고 왜곡하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하여 대처할 비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맑고 연한 희노란 벽지를 농도 옅은 적색으로 칠한 자는 시간이었다. 벽지는 워낙 희어서 빈 도화지에 수채 물감을 바른 것 같았지만, 벽지와 달리 하늘은 붓에 물감을 푹 묻혀서 그보다 더 진한 색으로 덧칠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색으로만 성의 없이 붉게 칠한 건 절대 아니었다. 아래에서 위로,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난색 계통의 색과 농도를 조절해서 그러데이션을 완성해야 하는 게 노을이었다. 동시에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도 고려해야 했다. 하늘을 칠하는 데 시간은 물통을 몇 번이나 갈아야 했을까. 실없는 생각 중에도 그는 문밖의 인기척이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행운인지 불운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드디어 포기하고 돌아섰음을 알았다.


‘드디어’라는 표현에는 이유가 있었다. 분침이 지금의 반대쪽을 가리키고 있을 때 네 목소리가 기척보다 먼저 작별을 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말을 삼킨 채 이제야 발걸음을 떼었고, 복도로 통하는 문에는 창이 없어 나는 네 표정을 알지 못한 채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다. 창이 있었더라면 네 표정을 볼 수 있었을까? 너는 문을 보고 있었을까, 등지고 서 있었을까. 건물 바깥 풍경만을 보여주는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유리창이 야속하다만 이마저 처음이 아닌 걸 너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웃으며 헤어졌을 때도 나는 항상 내가 널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너의 표정을 알고 싶었어. 문 뒤의, 복도에서의, 내게선 감췄을, 숨겼을 너를. 사실 그런 건 없었을지도 몰라. 내가 네게 그랬으니 너도 내게 그럴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건지도.


그리고 나는 여전히 너의 표정을 모르겠다.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저 네 뒷모습만을 그릴 따름이었다. 줄곧 바라보았기에 널 그리는 건 눈길을 여러 번 옮기지 않아도 될 만큼 수월했다. 내게 짓던 네 부드러운 미소도, 너는 보지 못하는 네 뒷모습도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묘사할 수 있다.


다만 네 윤곽을 잡으면서, 어쩌면 내가 너와 마주 보는 일은 더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너를 세세히 채워 넣던 눈과 손과 귀와 머리와 기억을 멈춰 세웠다. 그날 내가 본 네가 이제 내 기억에 남은 너의 가장 마지막 모습이 될 것이다. 지금 그리는 너의 모습이, 그러나 목소리는 오늘 내게 작별을 고한 너의 목소리로 남을 것이다. 너는 오늘 내게 작별을 고했지, 우리 관계의 종결을 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감히 짐작하여, 내 시선이 정면으로 도달하는 출입문에 창이 있었더라도, 혹은 문과 벽이 투명하여 너를 투시할 수 있게 되었더라도 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을 거라고 단언한다. 이제는 너도 네 시선에 나를 두지 않을 것이다. 너는 계속 너의 길을 걸으며 그곳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내 길과 맞닿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지독할 만큼 엉키고 설켜 무수히 많은 교차점을 만들었으므로, 이제는 갈라설 때다. 내가 이토록 확언하는 이유는 너의 목소리에서 너의 생각 또한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이 아니다. 그날 이후 처음 날 찾아온 네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그래서 나는 널 보지 않겠다고 했어. 태현아. 너도 알고 있었잖아. 우리는 헤어지게 될 거라고.


창문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게 노을인지 졸음인지 모르겠다. 가을 늦은 오후의 햇빛은 외풍이 들지 않은 실내에선 그저 따뜻했고 포근하여 사람을 노곤하게 했다. 나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고 나와 네가 얽힌 모든 것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난잡한데 피곤해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만 하면 되는데 드디어 찾아온 ‘평화’ 속에서 나는 왜 이 모든 생각에 파묻혀 있는 것일까.


생각을 멈추면 곧바로 다른 생각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연쇄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나를 세상에 고정하고 있었다. 더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더는 도망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한 힘으로 내 뺨을 잡아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막는다. 현실이면 그 손을 쳐 내고 눈을 감으면 된다. 하지만 현실이 아니니 밀칠 수 없고 눈길을 막을 수 없다. 아, 지금도 봐. 차가운 손에 소름이 끼친다. 눈을 감을라치면 빛이 스며들어 빨갛게, 눈꺼풀 안쪽을 물들여 버린다. 스스로 정신을 놓는 일도 허락하지 않는 그것은 꿈의 통제마저 앗아갔다. 어두운 검은 방에선 나 역시 그것의 일부가 되어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꿈에서조차 지쳐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뜨면 찰나의 휴식도 용납하는 일 없이 방 안에 빛이 가득했다. 아침이 되었다.


어렴풋이 어느 날 아침은 먹구름이 비를 내려 햇살을 가린다 해도 나는 변함없이 쉬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그러할까? 그자와의, 그들과의 만남도 영원히? 영원은 그것의 발치에도 닿지 못해 바동거리는 인간이 입에 담을 단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답을 짧게 중얼거리면.


아마도.


다리를 다치지 않은 나는 언제든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 문을 열고 나가 너를 만날 수 있는데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경첩이 녹슬어 내가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문고리의 열쇠 구멍이 밖에 나 있어 누가 나를 가둔 건 아닌지 무섭기 때문이 아니다. 녹슬긴커녕 반질반질 빛이 나는 둥근 손잡이와 소리 없이 잘 돌아가는 쇠 경첩은 그들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다. 저절로 회전하거나 하지 않고 문을 잘 닫아 두고 있으니 그들을 의심하는 건 가혹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각이다. 생각. 그건 한때 생각이었고, 의심이었고, 불안이었고, 충동이었고, 살의, 였고, 후회였고, 죄의식이었고, 죄책감이었고, 죄악감이었다. 나는 이곳에 가둬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침대 아래로 발을 뻗을 수 없는 것뿐이다. 발을 뻗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르겠다. 움직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침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잠이 들고 짧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하루를 사는 삶을 바꾸더라도 날 사로잡은 생각은 날 놔주지 않을 텐데. 여기서 나가도 진정으로 나가는 건 아닐 것이다. 여기가 어딘데. 어디로 나가는 건데. 갈 곳은 있나. 네 육신이 머물 곳을 말하는 게 아니야. 네 생각을 내보낼 곳. 나를 몰아낼 곳 말이야. 대답해, 여승아.


없을 테지.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던진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꼬리를 물던 생각이 뚝 끊어지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입을 다문다고 해서 세상이 정적으로 가득 차는 것은 아니다.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방 안의 다른 것도 나를 따라 소리를 삼키지는 않는다. 나는 한 번도 이곳을 조용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내가 생각할 때는 내 생각으로, 내가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내 것이 아닌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이곳은 언제나 요란하고 수선스러우며 야단스럽다. 나는 나밖에 없는 방 안에서 내 것이 아닌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놀라지 않고 태연했다. 나는 천천히 하늘과 문고리와 벽과 경첩과 너에게 쏠린 나를 잡아당겨 끌어낸 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던 내 혀는 굳지 않았고 다만 조금 말라 있었으나 매끄럽게 그의 이름을 발음한다.


“그렇겠죠. 허강민 씨.”


내 눈이 닿는 곳에 그는 없었다. 당연하다. 그는 죽었으니까. 그의 동생과 마찬가지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그러나 내 죄악의 증거를 가진 채로 살아 병원까지 갔던 그 애와 다르게 그곳에서, 거기서 죽어버렸으니까.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그의 죽음이다. 너도 잊지 못하고 있지? 나도 그래.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거야. 잊지 못할 거야.


그를 향해 달려가던 네 모습을 떠올린다. 마지막 순간 짓궂은 운명은 너에게 또 한 번의 선택을 강요했다. 그리고 너는 그를 선택하고 달려갔다. 그보다 가까운 곳에서 아래로 추락하던 나의 손은 누가 먼저 잡아 주기 전에 철골을 잡고 버텼다. 그게 우리의 그 날. 우리의 마지막 교차점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없어. 태현아.


본디 조용했을 하얀 방이 참을 수 없이 시끄러워지는 이유가 나인 걸 알기 때문이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에서, 그의 목소리에서, 아이의 목소리로, 다시 나의 목소리로 내게 돌아오는데 너에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듣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희라, 나의 죄가 한때는 나의 사랑이었음을 아는 너 나의 공범아. 너는 아직도 내게 이별을 고하길 주저하느냐. 나는 그날 이후로 언제나 네가 내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상상을 하고 준비를 했단 말이다. 침묵하는 순간에도 언제고 네가 그러자고 하면 그러마 할 마음을 감춰두었단 말이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오열하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솟구치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얼굴에 손자국이 난 아이가 물끄러미 지켜본다.


어느새 밤이 내린 방 안은 노을빛 하나 없이 암연하다. 나의 목소리가 진실로 끊어지는 날까지 귓가에 맴도는 소리가 멈추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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